-
-
스피노자의 진찰실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박수현 옮김 / 알토북스 / 2024년 12월
평점 :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작가 나쓰카와 소스케가 일본에서 2023년에 발표한 메디컬 소설입니다. 교토의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에서 소화기내과 의사로 근무하는 38살 마치 데쓰로가 주인공인데, 그는 여러 면에서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주인공 구리하라 이치토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구리하라가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이었다면 데쓰로는 철학자 스피노자의 사상에 심취한 ‘철학적인 의사’입니다. 무엇보다 권위나 명예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환자에게만 몰두하는 진정한 의사라는 점이 닮은꼴의 핵심인데, 그래선지 ‘스피노자의 진찰실’은 나이를 먹은 구리하라가 등장하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의 외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라쿠토대학에서 내시경 수술에 관한 한 최고라는 평을 듣던 데쓰로는 싱글맘이던 여동생이 투병 끝에 세상을 뜨자 어린 조카 류노스케를 돌보기 위해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지역의료기관인 하라다병원으로 이직합니다.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최첨단 의술을 익혀야 하고 병원 내 권력관계의 스트레스까지 감당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데쓰로는 하라다병원에서 전혀 새로운 의사의 길을 걷습니다. 무엇보다 임종을 앞둔 노령 환자나 말기암 환자가 대부분이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의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데쓰로는 3년 가까운 시간을 하라다병원에서 보내면서 그런 환자들에게 필요한 건 고도의 의술이 아니라 상대를 안심시키는 말 한마디와 진정성이 담긴 마음 한 조각이라는 걸 절실하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런 데쓰로의 태도는 환자뿐 아니라 동료의사들에게도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을 미칩니다.
“(스피노자는) 희망 없는 숙명론 같은 것을 제시하면서도 인간의 노력을 긍정했지.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의미가 없을 텐데, 그는 이렇게 말했거든. ‘그렇기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p204)
데쓰로는 “비록 병이 낫지 않더라도, 설령 남은 시간이 짧더라도 사람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게 내 나름의 철학이야. 그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해.”라는 식으로 자신이 심취한 스피노자의 사상을 의료현장에 대입시킵니다. 말하자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더라도 어떻게든 작은 행복을 맛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이 ‘의사 데쓰로’의 철학이자 사명이자 존재의 이유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선생님은 ‘안심’을 선물하는 것 같아요.”라는 새카만 후배의사의 한마디는 데쓰로가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압축해놓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있던 시절을 돌아보면 치료한 암의 형태나 색조는 확실히 기억하지만, 환자의 얼굴은 거의 기억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여기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잘 보여요.” (p59)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철학이 끼어든 재미없는 메디컬 소설 같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데쓰로 못잖게 괴짜 캐릭터를 지닌 동료의사들, 각자 기구한 사연을 지닌 환자들, 어떻게든 데쓰로를 대학병원으로 복귀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선배의사, 그리고 내시경 능력자인 데쓰로에게 배움을 청하러 왔다가 어떻게 봐도 유능한 의사로 보이지 않는 모습에 실망하지만 결국 그의 진심과 그가 추구하는 ‘의사의 길’에 감동을 받는 새카만 후배의사 등 여러 인물들이 데쓰로라는 별난 의사와 함께 매력적이면서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을 구축해냅니다. 또한 정취 넘치는 교토의 풍광과 단맛 마니아인 데쓰로가 소개하는 가지각색의 화과자와 모치(もち, 떡)의 향연은 별책부록처럼 독자의 오감을 즐겁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좀더 세고 자극적인 에피소드가 등장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절반, 그런 에피소드가 없어서 더 좋았다는 생각이 절반입니다. 양념이 살짝 덜 들어간 심심함이 아쉬움의 이유로 혹은 정반대로 호감의 이유로 작동할 수 있다는 뜻인데, 과연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느꼈을지 무척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2023년에 출간됐으니 만약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2025년엔 데쓰로의 두 번째 이야기가 출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억측이지만 나쓰카와 소스케가 후속작을 염두에 둔 듯 본문 여기저기에 데쓰로와 관련된 떡밥을 숱하게 깔아놓아서 그런 기대를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신의 카르테 시리즈’가 다섯 편으로 마무리된 게 너무 아쉬웠는데, 스피노자에 심취한 데쓰로가 그 배턴을 이어받는다면 더없이 반갑고 기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번역과 편집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후속작이 나온다면 그런 아쉬움들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