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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1933년, 미국 텍사스 동부의 작은 마을 마블 크리크에 사는 12살 소년 해리는 참혹하게 살해당한 뒤 강가에 유기된 흑인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지역경관인 아버지 제이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에 어떻게든 따라다니던 해리는 이후 유사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마블 크리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염소인간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제이컵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백인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덩달아 그동안 흑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제이컵 가족에 대한 비난과 압박도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을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얼마 후 한 흑인이 범인으로 매도당한 뒤 백인들에게 참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링컨이 흑인들을 해방시킨 지 한참 되었지만 당시 흑인들의 삶은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p79)
미국 남북전쟁이 1865년에 끝났으니 ‘밑바닥’의 시간적 배경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뿌리 깊은 노예제가 완전히 청산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은 무자비한 인종차별이 버젓이 자행됐다는 사실은 그 시대가 얼마나 참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또 그런 야만적인 세상에서 양심과 선량함이 얼마나 지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는지 새삼 피부에 와 닿도록 실감하게 만듭니다.
‘밑바닥’은 연쇄살인마의 실체를 밝혀내는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인종차별에 관한 생생한 고발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무거운 서사의 주인공이 12살 백인 소년이란 점은 안쓰러움과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키는데, 작가는 ‘인종차별 이야기의 주인공은 으레 선한 백인’이라는 도식적인 설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뿐인 정의감보다는 의무감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12살 소년 해리를 앞세움으로써 자칫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시킵니다.
과학수사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고, 목격자나 단서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제이컵의 수사는 범인이 자수하지 않는 한 100% 실패가 확실해 보입니다. 12살 소년 해리가 나름대로 벌이는 조사 역시 판타지가 아닌 다음에야 결실을 이룰 리 없어 보입니다. 중간에 투입되는 해리의 외할머니가 잠시 명탐정 흉내를 내긴 하지만 흔적도 남기지 않은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꼬리가 쉽게 잡힐 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사건 피해자가 흑인일 경우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놔두는’ 것이 당연한 관행인 현실 때문에 제이컵과 해리의 조사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 내동댕이쳐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독자 입장에선 과연 연쇄살인마가 잡히긴 잡힐까, 라는 우려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조 프로파일러라 불릴 만한 인물이 등장하여 연쇄살인마의 특징과 그가 남긴 ‘서명’을 분석하는 장면은 무척 흥미로웠고,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는 여러 인물들을 놓고 해리가 나름 추리를 이어가는 장면도 기특함(?) 이상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고 무고한 흑인이 참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이야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되찾는 대목부터는 다시금 미스터리 스릴러 본연의 서사가 매력적으로 전개돼서 마지막에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어줍니다.
조 R. 랜스데일은 2022년에 읽은 ‘빅 티켓’으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19세기 말 텍사스를 배경으로 강도들에게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하려는 16세 소년과 추적자 집단의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읽자마자 팬이 됐지만, 앤솔로지 외에 한국에 출간된 건 (2024년 현재) ‘밑바닥’이 유일한 작품이라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빅 티켓’과 ‘밑바닥’ 모두 시대적 상황과 스릴러 서사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품들이라 재미 이상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검색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