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홉 명의 목숨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아무런 접점도 없는 전국 각지의 아홉 명의 남녀가 자신들의 이름 아홉 개만 적혀있는 의문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중 한 명이 바닷가에서 익사체로 발견되고, 다음날엔 또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편지를 확보한 FBI는 남은 일곱 명을 수소문하는 것과 함께 수사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지만 명단 속 인물들 간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서 곤혹스러운 상황에 빠집니다.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탓에 수사에서 배제된 FBI요원 제시카는 아홉 명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던 중 의심스러운 정황을 발견하지만 좀더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이 없어 답답할 뿐입니다. 그 와중에 명단 속 인물들은 하나둘씩 전혀 다른 방법으로 살해당합니다.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줄거리만 보고도 이 작품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눈치 챌 것입니다. 실제로 본문 속에서 몇몇 인물들은 어릴 적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라며 그 내용 일부를 언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인물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이어 탐독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애쓰기도 합니다. 그래선지 ‘아홉 명의 목숨’은 국내외에서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영감을 받았다든지, 과감하게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아홉 명의 목숨’은 고전미가 물씬 풍기는 피터 스완슨 스타일의 범죄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체불명의 범인에 의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루지만 이야기는 꽤 완만하고 차분하게 시작됩니다. 기이한 편지를 받은 피해자들의 제각각의 반응(두려움, 무시, 은닉 등)과 함께 그들의 평범한 일상이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잔잔하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일상들은 연쇄살인사건과는 전혀 연관 없어 보여서, “피터 스완슨이 이렇게 느슨하게 시작하는 스타일이 아닌데...”라고 의아해 할 때쯤 첫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야기는 서서히 발동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내 한 챕터마다 한 명씩, 그것도 매번 다른 방식에 의해 살해되면서 긴장감과 속도감이 급속히 고조됩니다.
사실 큰 그림은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거란 예단 때문에, 또 명단 속 아홉 명은 과거의 특정한 비극에 가담한 죄로 범인의 살해 목록에 오른 게 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초반부터 궁금증 자체가 크게 들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매번 살인이 벌어질 때마다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전개되고, 사건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묘하게 불안감을 자극하는 장치들도 곳곳에 배치되어 있으며, 살해위협에 대처하는 각 인물들의 태도 역시 뜻밖인 경우가 많아서 과연 이들 중 누가 실제로 살해될 것인지, 누군가 살아남을 것 같긴 한데 과연 누구일지 등 독자의 눈길을 끄는 대목들이 수두룩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 경우엔 범인의 정체라든가 과거의 특정한 비극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피터 스완슨이 쓴 고전 미스터리는 어떤 맛일까?’라는, 마치 아이돌 가수가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유행했던 옛날 노래를 어떻게 소화해낼까, 와 비슷한 기대감이 더 컸는데, 결과만 말하자면 그 기대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채워졌습니다. 즉 그의 전작들에 비해 다소 밋밋한 구성과 전개에도 불구하고 미스터리의 농밀함이 더 진하게 느껴진 것도, 또 (의외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 예측 가능했던 엔딩이 나름 깊은 여운을 남겨준 것도 모두 피터 스완슨에게 있어 가장 큰 무기였던 ‘고전의 힘’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영감과 재해석의 원천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당연히 피터 스완슨만의 필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터 스완슨의 빠르고 세련된 서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이 작품의 호흡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오랜만에 ‘세련된’ 고전의 풍미를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아홉 명의 목숨’이 분명 좋은 선물이 돼줄 것입니다. 제 경우엔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벌써 몇 번이나 읽었던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는데, 모르긴 해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는 독자도 적잖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