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피
나연만 지음 / 북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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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살해한 안치호가 12년 만에 출소하자 준우는 그를 죽이기 위해 습격하지만 오히려 반격을 받고 정신을 잃습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안치호는 발목이 잘린 채 죽어 있고, 자신의 폰엔 잡혀 들어가기 싫으면 시체 치우기라는 알람 메시지가 떠있자 준우는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지시대로 안치호의 시신을 자신이 운영하는 반려동물 화장장에서 소각하긴 했지만, 준우는 누가 안치호를 죽인 건지, 자신은 왜 살려놓은 건지 알아내기 위해 잘린 발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현재 경찰이 수사 중인 아라뱃길 연쇄살인사건의 새로운 희생자로 보이게끔 아라뱃길에 유기합니다. 얼마 후 북인천경찰서 강력팀장 박한서가 준우를 찾아옵니다. 안치호에게 엄마를 잃은 준우는 누가 봐도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이기 때문입니다.


 

돼지의 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작가 프로필 가운데 여섯 번째 229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일이 229일인 두 남녀가 도박 사이트에서 만난 뒤 은행을 털다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이른바 한국형 정통 하드보일드라는 호평을 받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덕분에 작품명과 작가의 이름이 기억에 강하게 남았던 것입니다. 다만 여섯 번째 229의 저자가 송경혁이라서 어리둥절했는데,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니 나연만송경혁은 이명동인(異名同人)이 확실한 것 같아서 나름 기대를 갖고 돼지의 피를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돼지의 피의 서사와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건 두 개의 홍보카피입니다. 하나는 “‘살인자의 기질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전면에 내세운 서스펜스 스릴러이고, 또 하나는 핏줄을 타고 이어지는 업의 멍에. 죽이고, 없애는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입니다. ‘돼지의 피에는 잔인무도한 쾌락살인마, 기질적으로 살인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물, 평생 동물의 죽음과 사체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야 하는 인물 등 다양한 종류의 살인자가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주요인물 대부분이 살인자의 기질을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자들이란 뜻입니다.

이야기 역시 두 축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아라뱃길 연쇄살인사건이고, 또 하나는 안치호를 죽인 건 누구인가?’라는 미스터리입니다. 원래 두 사건은 전혀 연관성이 없었지만 준우가 안치호의 잘린 발목을 아라뱃길에 유기하면서 절묘하게 엮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살인자의 기질을 타고났거나 물려받은 자들이 벌이는 서스펜스 스릴러가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으며 전개됩니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돼지농장에서 숱한 죽음과 매장을 지켜보며 성장한 준우, 엄마가 살해당한 뒤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고 지금은 동수원경찰서 강력팀에 근무하는 준서(준우의 이부누나), 누구보다 뛰어난 감을 지녔지만 사회성이 부족한 베테랑 형사 박한서 등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세 인물은 일반적인 장르물의 주인공과 달리 정의나 사명감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살인자를 쫓는 미션에 충실하긴 하지만 그들의 태도와 목적은 다분히 불온하고 음습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업의 멍에라든가 운명같은 것에 휘둘리는 듯 보이지만 그게 전부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마음속에 층층이 퇴적된, 그래서 달콤한 향기와 지독한 악취가 혼재하는 복잡하고 일그러진 그 뭔가에 지배당한 인물들이라고 할까요? 다소 애매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들이 발산하는 어두운 기운은 돼지의 피라는 제목과 함께 초반부터 독자를 바짝 긴장시키는 요소입니다.

 

전개도 빠르고, 인물들도 매력적이며, 두 갈래로 갈라진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구성도 촘촘해서 금세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지만, 사실 다 읽은 뒤에 받은 첫 느낌은 찜찜함이었습니다. 좋게 얘기하면 여백과 생략을 통해 독자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은 구성의 결과이고, 반대로 얘기하면 애매모호하고 불친절한 설명의 결과입니다. 사건은 단순명쾌하게 해결됐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면의 이야기들(특히 준우 가족의 과거와 현재)이 안개 속 풍경처럼 뇌리에 남은 탓에 서평을 쓰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엔 물음표가 잔뜩 날아다니는 중입니다. 화자 역할을 맡은 준우는 제외하더라도 준서는 왜? 남매의 부모는 왜? 그리고 박한서는 왜?” 등 독자의 상상만으로는 유추하기 어려운 의문들이 미제 상태로 남았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장르물은 사건이든 인물이든 마무리 지점에서만큼은 깔끔하고 선명해야 한다는 생각인데, ‘돼지의 피는 적어도 인물들에 관한 한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입니다. 물론 저의 오독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도 찾아 읽을 생각이지만, 확실한 건 그 아쉬움 때문에 두 개의 홍보카피가 심어놓은 기대감이 온전히 충족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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