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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물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4년 8월
평점 :
‘가연물’은 군마 현경 수사1과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찰 미스터리 단편집입니다. 꽤 많은 경찰 미스터리를 읽었지만 ‘가연물’처럼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하고 사족 하나 없이 매끈한 작품은 거의 처음인데,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가쓰라 경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상사로부터 외면당한다. (부하들로부터) 좋은 상사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사능력은 탁월하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 (뒷표지 카피)
가쓰라는 천재적인 명탐정도 아니고, 특이하거나 괴팍한 캐릭터도 아니며, 자신만의 고뇌와 갈등에 휩싸인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수사방법 역시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규범적입니다.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탐문에 나서기도 하며, 수집된 정보와 단서들을 꼼꼼하게 훑어보곤 그 안에서 진상을 찾아내는, 유능하긴 해도 아주 평범한 경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쓰라가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지점은 바로 마지막 한 단계의 ‘비약’이 필요한 수사 막바지입니다. 일부 천재적인 명탐정의 경우 독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뜬금없는 추리를 앞세워 말도 안 되는 비약을 일삼곤 하지만, 가쓰라는 부하들과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공개된 단서를 기반으로 마지막 한 걸음을 훌쩍 뛰어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흉기의 행방(‘낭떠러지 밑’),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해서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는 복수의 목격진술들(‘졸음’), 굳이 눈에 띄는 장소에 토막 시신을 유기한 범인의 의도(‘목숨 빚’), 소규모 연쇄방화범의 가늠할 수 없는 동기와 목적(‘가연물’), 그리고 절체절명의 인질극 와중에 느껴지는 지독한 위화감(‘진짜인가’) 등 가쓰라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거나 주목하더라도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에서 마지막 고민에 돌입합니다. 이미 지겹게 봐온 자료와 사진들을 펼쳐놓고, 또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하나씩 되짚거나 형사들의 보고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위화감을 품게 만든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 골몰합니다. 그리곤 예의 마지막 한 걸음을 거쳐 진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한 걸음을 확인한 독자는 대부분 “나도 눈치 챌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가쓰라에게만 보이는 세계’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쓰라의 이런 행보가 상관과 부하들에게 좋게 보일 리는 만무합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포착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화감이 해소될 때까지 수사를 강행하는 가쓰라는, 검거율은 높지만 부하들과의 협업보다는 ‘원맨팀’이라는 비난을 위아래로부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하들이 거북해 하는 걸 알면서도 탐문과 심문에 끼어드는가 하면, 굳이 맡을 사건이 아닌데도 원칙을 내세우며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곤 합니다. 다만, 가쓰라를 좋은 부하나 좋은 상사라고 여기지 않는 그들도 그의 수사 능력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군마 현경에서 외딴섬처럼 ‘원맨쇼’를 벌이는 가쓰라를 지켜보는 게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쓰라처럼 건조하고 사족 없는 주인공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인간미가 넘쳐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선지 가쓰라에게 연민이나 정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깔끔하고 공정한 미스터리를 읽고 싶을 때나 괜히 화려하고 별난 설정으로 변죽만 울리다가 용두사미가 되는 미스터리에 지칠 때엔 불쑥 가쓰라의 마지막 한 걸음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후속작 출간이 예정돼있는 것 같은데,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래도 가쓰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짝이라도 맛보고 싶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고민이든, 가족의 문제든, 그를 못 마땅히 여기는 상관이나 부하들과 충돌하는 모습이든 뭐라도 좋으니 그저 ‘수사 기계’가 아닌 ‘인간 가쓰라’와 만나보고 싶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