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GER
구시키 리우 지음, 곽범신 옮김 / 허밍북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0년 전, 두 명의 여아를 잔인하게 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2인조 중 한 명이 옥사하자 당시 수사진에 소속됐던 호시노 세이지는 복잡한 심경에 빠집니다. 진술도, 단서도 확고하지 못한데다 구식 DNA 검사의 신뢰성도 떨어졌기에 세이지는 그들이 진범이 아닐 것 같다는 심증을 품은 바 있고, 그 심증은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은퇴 후 5년이 지났지만 세이지는 개인적인 차원의 재조사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손자 아사히와 그의 절친이자 컴퓨터와 영상제작에 탁월한 데쓰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경찰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SNS를 통해 사건을 알리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예상 밖의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세이지 일행은 진범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이 들어간 택배를 받고 큰 충격에 빠집니다.

 

구시키 리우는 2019사형에 이르는 병’(死刑にいたる)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그 작품을 읽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서술트릭의 명작인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殺戮にいたる)의 후광에 기대려 한 듯한 다소 경박해 보인 제목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TIGER’ 역시 처음엔 관심 밖에 뒀던 작품이지만, 원죄(冤罪) 사건, 즉 누명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 흥미를 갖게 됐고, 일단 초반 100페이지까지만 읽어볼 심산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세이지와 아사히와 데쓰가 이끄는 이른바 팀 호시노가 당시 담당기자였던 오노데라, 인권변호사 가타기리, 방송사 프로듀서 후쿠나가 등과 함께 30년 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일단 사건을 환기시키고 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인터넷과 SNS를 이용하여 관심을 유도합니다. 우회적으로 압박을 가하며 조사 중지를 요구하는 경찰과 관종 아니냐?”는 식의 인터넷 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팀 호시노는 두 범인의 주변인물은 물론 유족들을 꼼꼼히 탐문하며 30년 전 경찰이 놓친 게 뭔지 알아내려 분투합니다. 그러던 중 진범만이 알 수 있는 표식이 들어간 택배가 언론사에 배송되면서 상황은 급변합니다. 여론과 언론이 들끓기 시작하고 팀 호시노의 재조사는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과연 팀 호시노30년 전 경찰의 수사를 뒤집고 원죄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범죄 미스터리 소설이지만 ‘TIGER’는 꼼꼼하게 기록된 수사일지처럼 읽히는 작품입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한 여론몰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긴 해도, ‘팀 호시노가 숱한 발품을 팔아가며 탐문하고 조사하는 내용들이 무척 상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30년 전의 사건이다 보니 남아있는 기록도, 주변 인물들의 진술도 선명하지 않은 탓에 다소 장황한 묘사가 불가피했겠지만, 독자에 따라 초반부터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또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 벌어진 유사한 사건들까지 자세하게 인용하곤 하는데 때론 작가의 과욕으로 보였던 부분도 있었습니다.

또한 사건과는 무관한 몇몇 인물들의 설정도 딱히 설득력이 없어 보였는데, 아무래도 수사일지 혹은 논픽션처럼 건조하게 읽힐 가능성 때문에 작가가 나름 드라마를 만들어 넣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메인 스토리 속에 잘 녹아들었다면 좋았겠지만, 다 읽은 뒤에도 왠지 따로 논 것 같은 인상을 지우진 못했습니다.

 

물론 잘 짜인 범죄 미스터리답게 이야기는 반전을 거듭하며 예상 밖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주인공 세이지가 30년 동안 품어왔던 여러 종류의 위화감의 정체도 깔끔하게 해소됩니다. 적잖은 인물과 수많은 단서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모두 제자리를 잘 찾아들어간 느낌이라고 할까요? 다만 언론이 가세했다고는 하지만 민간인인 팀 호시노의 조사가 인터넷과 SNS의 힘으로 큰 어려움 없이 성공한 점이라든가 진상이 밝혀질 경우 여러 모로 곤란해질 것이 분명한 경찰의 압박이 생각보다 약했던 점이 무척 아쉬웠는데, 다소 과도했던 수사 일지 같은 대목들 대신 팀 호시노의 위기나 경찰과의 갈등이 들어갔더라면 더 풍성한 이야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사형에 이르는 병을 안 읽어서 잘 모르겠지만, 출판사 소개글을 보면 구시키 리우는 범죄자의 심리를 실감 나게 묘사하기로 이름난 작가라고 합니다. 각 챕터 말미에 범인이 여아들을 납치하고 폭행하고 살해하는 장면들이 실려 있는데, 그 대목을 보면 출판사의 소개글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덕분에 뒤늦게라도 사형에 이르는 병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TIGER’의 경우 피해자들이 불과 7~8세의 어린 여아들이다 보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된 범행 장면을 읽는 건 고역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독자라면 꼭 참고하기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