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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1 - 이상한 의사 ㅣ 아르테 오리지널 6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채숙향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평점 :
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 내과 5년차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괴짜 의사로 불립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는 등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2021년까지 한국에 모두 다섯 편이 출간된 ‘신의 카르테’는 바로 괴짜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펼쳐 보이는 진정한 의술에 관한 이야기이자 그의 평생의 고민 - 좋은 의사란 무엇인가 - 을 따뜻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휴먼 메디컬 소설입니다.
3년 전 ‘신의 카르테 4 : 의사의 길’을 읽고 푹 빠져서 당장 첫 편부터 찾아 읽으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오다가 뒤늦게 순서대로 읽기로 했습니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1–2–3-0(프리퀄)-4’ 순서로 출간됐으며, 이 순서대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의술과 인술을 모두 겸비했지만 살짝 괴짜 기질이 있는 구리하라 이치토는 누구나 현실에 존재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는 존재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판타지 캐릭터입니다. 좋은 의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고통과 고독에 잠식된 환자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고뇌하는 그의 모습은 수시로 눈물을 쏙 빼낼 정도로 감동적이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더구나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듯한 허술하면서도 엉뚱한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미는 그에 대한 애정을 더욱 강렬하게 만듭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의사라는 뜻인데, 그래선지 이 시리즈를 읽는 내내 “의사들의 필독서가 됐으면 좋겠네.”라는 생각을 여러 번 하곤 했습니다.
구리하라는 이 작품 속에서 몇몇 환자의 죽음을 지켜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말기 암이나 노령으로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 대처하는 자세를 거듭 고민합니다. 특히 신과 인간의 영역이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곳에서 행해지는 최첨단 장비와 고도의 의술에 의한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회의감을 갖습니다. 오히려 운명이란 신에 의해 이미 정해져있으며, 의사가 환자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편안함이나 위로라고 믿습니다. “의사는 치료만 하는 게 아니다.”라는 신념과 함께 말입니다. 아마 이 시리즈에 ‘신의 카르테’라는 제목이 붙은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구리하라가 근무하는 혼조병원은 지방 소도시의 의료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터무니없이 부족한 의사와 밀려드는 환자들 때문에 이른바 ‘의료의 밑바닥’이라고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황입니다. 구리하라가 인근의 대형 대학병원 대신 혼조병원을 선택한 건 딱히 어떤 이상이나 의무감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많은 곳을 싫어하는 그의 괴팍한 성격 때문이었는데, 5년차에 이른 현재 구리하라는 혼조병원에서의 진정한 의료를 이어갈 것인지 대학병원에서 좀더 차원 높은 의술을 연마할 것인지 때문에 고민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신의 카르테’는 단지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에 머물지 않고 사회파 소설로서의 미덕도 품게 됩니다.
혼조병원 외에 구리하라의 괴짜 기질이 발휘되는 곳은 아내 하루나와 함께 살고 있는 오래된 목조 가옥 ‘온타케소’입니다. 여관이던 곳을 하숙으로 개조한 그곳엔 구리하라를 능가하는 괴짜들이 여러 명 살고 있는데, 그들과의 인연 역시 꽤 비중 있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구리하라가 근무하는 혼조병원이 ‘의료의 밑바닥’으로, 그가 사는 온타케소가 ‘사회의 밑바닥’으로 묘사되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의사 구리하라’가 아닌 ‘인간 구리하라’의 진면목을 목격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지면서 여러 번 눈가가 뜨끈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250여 페이지의 짧은 분량에 불과하지만, 메디컬 소설이 갖춰야 할 모든 미덕을 골고루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또한 30대 초반으로 새내기 의사라고 할 수 있는 괴짜 구리하라가 어디까지, 얼마만큼 성장할지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2편의 부제가 ‘다시 만난 친구’인 걸 보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것 같은데, 조금씩 아껴 먹고 싶은 특별한 간식 같아서 연이어 읽을 것 같진 않지만, 구리하라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한 게 사실입니다. 심각한 장르물 편식 독자지만 어떻게든 올해 안에 구리하라의 이야기를 모두 읽어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