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평점 :
월향신사에는 거대하고 장엄한 녹나무 한 그루가 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 밤마다 나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면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끼리 염원을 주고받을 수 있다. 녹나무에 염원을 새기면 예념이고, 그것을 받으면 수념이라고 하는데, 예념자와 수념자를 이어 주는 사람이 바로 파수꾼이다. 나오이 레이토는 이모 치후네의 뒤를 이어 새로운 파수꾼이 돼 매일같이 신사 경내를 청소하고 예념자와 수념자를 안내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집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달아 침입한 기이한 사건 때문에 레이토는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된다. 더구나 시집(詩集)을 대신 팔아 달라는 여고생과 잠들면 기억을 잃는 소년까지 나타나며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녹나무의 여신’은 2020년 출간된 ‘녹나무의 파수꾼’의 후속작으로, 혈연으로 이어진 사람들 사이에 염원을 주고받게 해주는 신비하고 영험한 녹나무와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인 나오이 레이토가 펼쳐 보이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자 힐링 판타지 미스터리입니다. 불우한 성장과정을 겪다가 전과자가 될 뻔했던 레이토가 이모 치후네에게 구원받은 뒤 신사 관리인이자 녹나무 파수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가 전작의 주요 내용이라면, ‘녹나무의 여신’은 아직 어설프긴 해도 어엿하게 성장한 레이토가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운명에 따뜻하고 훈훈한 영향을 미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그것들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한줄기로 합쳐지면서 거대한 녹나무가 발산하는 긍정과 선의의 에너지에 맞먹는 애틋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합니다. 신사 인근의 한 주택에 절도범과 강도가 연이어 든 사건 때문에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는 레이토의 이야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고, 자신이 직접 쓰고 제본한 시집을 신사에서 판매하게 해달라며 레이토를 찾아온 여고생 유키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뇌종양 수술 이후 심각한 기억장애 - 잠이 들면 전날의 기억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장애 - 를 겪고 있는 중학생 소년 모토야는 누구에게나 철벽을 친 채 살아가지만 우연한 기회에 레이토와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는 것은 물론 특별한 그림 재능 덕분에 시를 쓰는 유키나와 함께 그림동화를 만들기로 하는 등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레이토를 수렁에서 구원해준 이모 치후네의 인지장애 증세가 점차 심각해지면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이야기 역시 나머지 이야기들과 절묘하게 연결되면서 독자의 눈가와 코끝을 수시로 찡하게 만들곤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원 픽을 꼽으라면 전 주저하지 않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추천합니다. 결은 전혀 다르지만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비밀’. 그리고 ‘녹나무 시리즈’는 기적에 관한 판타지이자 선의를 전염시키는 힐링 소설이며 하나같이 수시로 눈물을 뽑아내고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실 전편인 ‘녹나무의 파수꾼’은 그런 기대감이 너무 강했던 탓에 제대로 눈물을 뽑아내지 못했는데, ‘녹나무의 여신’은 그때와는 반대로 일부러 기대감을 낮춘 덕분인지 예상 밖으로 여러 대목에서 목구멍과 눈시울이 뜨끈해지는 행복한 경험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 행복한 경험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물론 주인공 레이토지만, 이 작품은 주요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갈래의 이야기들이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개돼서 더 애틋하고 특별하게 읽혔습니다. 대부분 불행하거나 불우하거나 불안감에 사로잡힌 인물들이지만 그들은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통해 삶과 운명, 현재와 미래, 희망과 도전에 대해 조금은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얻게 됩니다. 물론 그 여유는 거꾸로 레이토에게 선한 전염력을 발휘하여 그의 성장에 의미 있는 자양분이 돼주기도 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기적, 힐링, 판타지 같은 단어가 소개글에 들어있으면 막연한 거부감부터 발동하는 게 사실인데, ‘녹나무 시리즈’를 소개할 때 이 단어들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그동안 선보인 기적과 힐링과 판타지를 한 번이라도 맛본 적 있는 독자라면 ‘녹나무의 여신’이 어떤 매력을 품고 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지만 혹시 ‘녹나무의 파수꾼’에서 밋밋함 이상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 독자라도 ‘녹나무의 여신’만큼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