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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와의 7일 ㅣ 라플라스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4년 6월
평점 :
지금은 민간 보안업체에서 일하지만 한때 경시청의 지명수배자 전담 형사였던 쓰키자와 가쓰시가 익사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은 목격자와 단서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좀처럼 실마리를 잡지 못합니다. 정의감 넘치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는 쓰키자와의 죽음이 17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과 연관 있음을 감지하지만 상부의 함구령 때문에 단독 수사에 나서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중 쓰키자와의 아들인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가이메이 대학 수리학 연구소 직원 우하라 마도카가 범행 장소를 특정해내자 와키사카와 경찰은 놀람과 함께 곤혹스런 처지가 됩니다. 와키사카는 민간인인 마도카와 리쿠마의 위험한 조사에 반대하지만 이내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라플라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마녀와의 7일’은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라플라스의 마녀’ 마도카가 주인공이 아니라 피해자의 아들이자 아버지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려는 중학교 3년생 리쿠마와, 전직 형사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17년 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젊은 형사 와키사카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물리적 현상을 예측해내는 신비로운 소녀’ 우하라 마도카가 살인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은폐됐던 진실을 폭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긴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타이틀 롤을 리쿠마와 와키사카에게 양보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범죄 미스터리가 주된 서사이고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이 필수적인 양념으로 곁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마녀와의 7일’은 경찰의 수사 영역에까지 깊이 파고든 AI의 양면성, 개인의 DNA 정보까지 확보하려는 극단적 감시 시스템에 대한 논쟁,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도 인간의 뇌와 정신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반론 등 근미래에 닥칠 것이 분명한 현실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합니다. 살해당한 전직 형사 쓰키자와 가쓰시는 이 주제들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인물인데, 그는 일명 ‘미아타리 수사원’, 즉 전국의 지명수배자의 얼굴을 기억한 뒤 길거리에서 무작정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기억 속 지명수배자가 눈에 띄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는 특이한 형사였습니다. 인간의 뇌와 기억과 감각을 최대치로 연마한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AI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 능력들은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촘촘하게 설치된 CCTV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찍어서 전송하면 AI는 사전에 입력된 지명수배자 사진과 대조하여 즉시 체포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쓰키자와 가쓰시를 비롯하여 여러 인물을 통해 이 민감하고도 양면적인 주제들을 심도 있게 그려냅니다.
‘라플라스의 마녀’ 마도카의 맹활약을 기대했던 터라 그녀의 비중이 조연으로 축소된 건 무척 아쉬웠지만, 대신 오랜만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대로 된 범죄 미스터리를 만끽할 수 있어서 대만족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쫓으며 미처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리쿠마의 사연은 긴장감 속에서도 애틋함을 느끼게 했고, 모두가 판도라의 상자라고 여기는 위험천만한 비밀을 오로지 정의감 하나로 과감하게 뒤쫓는 와키사카의 행동력도 흥미진진했습니다.(어쩌면 이 작품을 계기로 ‘와키사카 시리즈’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AI의 양면성과 극단적 감시 시스템의 폐해는 묵직하면서도 생생한 묘사 덕분에 피부에 와 닿을 정도로 강렬한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지만, 우하라 마도카와 쓰키자와 가쓰시가 입증한 인간의 뇌와 정신의 위대함은 그에 못잖은 안도감을 전해주면서 나름 단단한 격려의 메시지로 읽히기도 했습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라플라스 시리즈’는 당분간 후속작이 나오기 어려워 보입니다. 마도카의 특별한 능력만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건 더는 식상한 시도일 테고, 조연으로서 맹활약하는 것도 ‘마녀와의 7일’의 동어반복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물론 후속작이 나온다면 더없이 반가울 것이고, 히가시노 게이고라면 저의 근거 없는 우려 따위는 아주 쉽게 털어내며 더 멋진 이야기를 자아낼 게 분명합니다. 아주 긴 시리즈까진 바라지 않지만, 마도카가 새로운 레벨에서 새로운 테마로 맹활약하는 걸 적어도 두세 편 정도는 더 지켜볼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