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미친 반전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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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살 리에는 아빠 오무로와 함께 생전의 큰아빠가 소유했던 에다우치지마섬을 방문합니다. 관광회사, 부동산회사, 건축사무소 등 섬에 리조트 시설을 건설하려는 시찰단에 소유주 가족 자격으로 동행한 것입니다. 하지만 도착과 함께 일행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5년 넘게 방치됐던 섬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물론 엄청난 양의 폭탄이 적재돼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패닉에 빠진 탓에 경찰 신고마저 다음날로 미뤘지만, 일행 중 한 명이 다음날 아침 참혹한 사체로 발견되면서 섬의 상황은 돌변합니다. 범인은 일행들이 지켜야 할 열 개의 계율을 종이에 적어 남겼는데, 그걸 어겼을 때 당하게 될 보복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2023년 한국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클로즈드 서클물 방주에 이은 유키 하루오의 일명 성서 3부작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목만 보면 종교적 색채가 깃든 작품이 아닐까 오해하기 쉽지만 실은 십계, 즉 열 가지 계율은 연쇄살인범이 일행들에게 내린 기이하면서도 엄격한 지시사항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지시사항들 때문에 십계는 클로즈드 서클물과는 정반대의 규칙을 품게 됩니다. 즉 외부와 단절된 밀실에서 살인이 벌어지면 서로를 의심하며 누가 범인인지 알아내려는 팽팽한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전개되는 것이 클로즈드 서클물의 규칙이지만, ‘십계는 배경 자체가 전화와 인터넷이 잘 터지는 섬이란 점부터 전혀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밀실이면서 동시에 밀실이 아닌 느낌이랄까요? 또한 범인이 내건 계율에 따르면 일행들이 살아남으려면 경찰 신고는 물론 사건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는 것도, 범인을 추리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계율을 어긴 대가는 섬에 설치된 대량의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기 때문에, 일행들은 “3일 후엔 섬을 떠나게 해주겠다.”라는 믿기 어려운 범인의 메시지에만 의지한 채 지옥과도 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범인이 실수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거나 단서를 남겨서 일행들이 진상을 알게 되는 경우에도 폭탄에 의한 떼죽음이라는 대가는 똑같다는 점입니다. 결국 일행들은 부디 범인이 성공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뒤 자신들을 섬 밖으로 내보내주길 바라게 됩니다. 말하자면 폭탄에 통제당한 상황에서 범인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물론 필요한 경우 그의 범행에 협력까지 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셈입니다. ‘방주가 밀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한시라도 빨리 범인을 찾아내야 하는 미스터리였다면, ‘십계는 살아남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심지어 범인을 도와야 하고, 범인이 실수하지 않기를 기원해야만 하는 특이한 미스터리입니다.

 

하지만 정말 등장인물 전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이야기 자체로 실격인 셈이고, 당연히 십계에는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다만 계율에 의한 제약이 너무 심한데다 일행 중 그 누구도 탐정의 등장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탐정 역할을 맡은 인물의 동선은 극히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지금껏 맛보지 못한 독특한 긴장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로를 의심하며 범인을 찾아내려 분투하는 클로즈드 서클물에 비하면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이 살짝 떨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방주가 시종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면 십계는 탐정 역의 인물이 진상을 폭로하는 장면에서도 흥분과 열감이 기대치만큼 높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유키 하루오의 진가는 바로 그 대목부터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끝났나, 싶으면 반전이 뒤통수를 치고, 이번엔 진짜 끝났나, 싶으면 ? 이거 뭐지?”라는 엄청난 위화감을 선사합니다. 특히 마지막 페이지의 반전은 쉽사리 눈치 채지 못할 독자들이 꽤 있을 텐데, 그걸 제대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옮긴이의 말까지 읽어야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처럼 100% 이해가 안 돼서 결국 다른 텍스트까지 뒤적이는 수고를 감당한 독자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방주때문에 한없이 기대치가 높아졌던 탓에 살짝 아쉬움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십계는 유키 하루오의 정교한 미스터리와 반전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수작이라는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유키 하루오는 방주십계에 이어 낙원이라는 작품을 준비 중이랍니다. ‘성서 3부작이란 명칭에 어울리는 라인업인데, 문득 낙원의 탈을 쓴 밀실 지옥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반전 파티라는 카피가 떠오를 정도로 전작들을 능가하는 작품이 아닐까, 기대하게 됩니다. 머잖아 유키 하루오의 신작 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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