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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시간의 법정
이가라시 리쓰토 지음, 천감재 옮김 / 시옷북스 / 2023년 6월
평점 :
제목에서 연상되듯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법정 미스터리에 타임 슬립을 가미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5년 전 의붓딸 성추행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아버지의 무고함을 연이은 타임 슬립을 통해 밝히는 것이 법원서기관인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의 미션인데, 문제는 그가 미션에 성공하여 ‘과거’를 바꿔버린 탓에 ‘현재’가 심각하게 뒤틀어지는 것은 물론 아버지마저 치명적인 위기에 봉착하고 만다는 점입니다. 과거를 그대로 두면 아버지는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되고, 과거를 바꾸면 아버지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딜레마 속에서 우구이 스구루는 제대로 된 탈출구를 찾기 위해 거듭 타임 슬립을 감행합니다.
원래 타임 슬립 이야기에서 과거를 바꾸는 것은 금기나 다름없는 규칙이었습니다. 현재가 뒤틀어지기도 하거니와 평행세계 같은 애매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작가나 독자 모두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이 금기를 깬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뒤틀린 시간의 법정’의 경우 아예 돌직구처럼 정면으로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을 표방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과거를 바꾸는 타임 슬립’은 나름 호기심을 자극하며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과거를 바꿀 수도, 안 바꿀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 주인공 우구이 스구루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될지,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그려질지 무척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별 3개의 평점에 그친 이유는 중반 이후 새로운 설정이 추가되는 대목에서부터 도저히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따라가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하고 난해한 작가의 설계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독자의 나쁜 머리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지점부터 이야기는 속도감도, 긴장감도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우구이 스구루가 딱히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될지도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 시점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전히 많은 페이지가 남아있다 보니 솔직히 후반부는 거의 스킵하듯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가라시 리쓰토는 ‘법정유희’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그보다 한국에 9개월 정도 앞서 출간된 이 작품을 먼저 읽었더라면 별 4.5개를 준 ‘법정유희’는 읽을 생각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저처럼 ‘뒤틀린 시간의 법정’에 적응하지 못한 독자라도 ‘법정유희’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란 뜻입니다.
천재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한 우매한 독자라고 욕먹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겐 ‘뒤틀린 시간의 법정’은 너무도 어려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서평을 쓰기 전에 일부러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읽지 않았는데, 인터넷서점과 블로그에 서평을 올리고 나면 다른 독자들의 생각을 꼭 확인해볼 생각입니다. 혹시나 제가 성급하게 오판을 저지른 게 확실하다면 (고통스런 책읽기가 되겠지만) 다시 한 번 도전해볼 생각도 조금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