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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리스트
재키 캐블러 지음, 정미정 옮김 / 그늘 / 2024년 4월
평점 :
범죄전문 프리랜서 기자인 메리 엘리스는 자기 이름이 포함된 살인 예고장을 받습니다. 범인이 보낸 예고장에는 매월 1일 한 명씩, 넉 달에 걸쳐 네 명이 살해될 거라고 적혀있는데, 문제는 ‘버밍엄의 제인’이나 ‘카디프의 데이비드’처럼 대도시에 사는 흔한 이름이라 피해자를 특정할 수도, 미리 대처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살인 예고장엔 마지막 타깃으로 ‘첼트넘의 메리’를 지목했는데, 메리는 부디 자신이 아니기를 바라면서도, 범죄전문 기자 특유의 의지를 발휘하여 스스로 사건 조사에 나서기로 합니다. 한편 예고장에 적힌 대로 석 달에 걸쳐 세 명이 살해당하지만 경찰은 희생자들 간의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해 궁지에 몰립니다.
독특한 예고살인을 소재로 한 심리스릴러입니다. 넉 달에 걸쳐 매월 1일마다 한 명씩 살해하겠다고 선언한 범인은 예고장에 희생자의 이름과 주거지를 공개했지만, 말하자면 ‘서울에 사는 김씨’ 식이라 경찰 입장에선 무용지물이나 없는 단서일 뿐입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앞선 세 명의 희생자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살해된 것과 달리 마지막 타깃인 ‘첼트넘의 메리’는 살인 예고장을 직접 전달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메리와 경찰이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범인 입장에선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자초한 셈인데, 그 의도를 알 수 없어 경찰도, 메리도 대혼란에 빠집니다.
희생자들 간에 연관성이나 공통점도 없고, 합동수사를 한다고 해도 관할서가 전부 달라 화상회의 이상의 수사를 할 수도 없으며, 한 달 단위로 살인사건이 일어나다 보니 사건 자체가 주목받기는 어려운 구조의 작품입니다. 오히려 눈길을 끄는 건 메리가 감추고 있는 비밀스런 과거사나 그녀가 겪는 의심과 공포 그리고 그녀 주변 사람들의 수상쩍은 언행 등입니다. 살인 예고장을 소재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스릴러로 분류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8살 때 메리의 아버지와 절친을 앗아간 대형 화재의 비밀, 애인 있는 ‘남사친’ 피터에게서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벌이는 위험한 사랑, 공유오피스의 동료지만 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듯한 두 남자에 대한 의심 등이 살인 예고장의 공포와 함께 메리의 일상을 잠식합니다.
중반부와 막판에 터지는 연이은 반전도 흥미롭고, 페이지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지만 후한 평점을 주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살인 리스트’가 제가 심리스릴러를 기피하는 이유를 모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거듭된 심리묘사는 이야기를 한없이 늘어지게 만들고, 뭔가 있을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상 별로 ‘영양가’가 없을 게 확실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도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서 450여 페이지의 분량이 과도하게 보였습니다.
초반에는 꽤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야기가 빠른 속도로 출발하지만, 사건 자체가 임팩트가 없는 상태에서 심리스릴러 서사마저 느슨하게 전개되는 바람에 중반부쯤부터 동력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즈음에 터진 첫 번째 반전이 새 연료 역할을 하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출판사 자체 스포일러’ 때문에 미리 짐작하고 있던 바라 잠시 맥이 빠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개글과 띠지에 적힌 한 줄의 문장은 나름 출판사의 홍보 포인트였겠지만, 눈썰미 있는 스릴러 독자라면 아마 저처럼 스포일러로 받아들였을 거란 생각입니다.)
‘살인 리스트’는 ‘퍼펙트 커플’에 이어 두 번째로 읽은 재키 캐블러의 작품인데, 아무래도 그녀의 심리스릴러는 저와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퍼펙트 커플’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인 리스트’의 경우 ‘살인사건과 범인 찾기’라는 미스터리 서사가 병행돼서 “딱 한 번만 더!”라며 읽어보기로 했던 건데, 실은 미스터리 요소들 대부분이 허술한 편이었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 동기마저 너무 실망스러워서 혹시 재키 캐블러가 정통 미스터리 스릴러를 내놓는다고 해도 더는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심리스릴러 마니아라면 재미있게 읽을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니 소재나 설정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