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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 - 두 남매 이야기 ㅣ 케이스릴러
전혜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5월
평점 :
부모 살해죄로 5년 형을 복역한 서준현이 출소합니다. 이복동생 나현을 성폭행하던 아버지는 물론 의붓어머니까지 살해한 중범죄였지만, 정황 상 동정의 여지가 많았고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어서 정상이 참작됐던 것입니다. 나현은 자신을 지키려다 살인까지 저지른 준현을 감싸며 앞으로는 자신이 그를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경기도 장제시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서윤병원 원장인 서필환은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손주인 준현과 나현에게 물려주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엄청난 반발과 후폭풍을 몰고 왔고 결과적으로 준현과 나현을 큰 위험에 빠뜨립니다. 그런 와중에 5년 전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려는 기자까지 나타나자 준현과 나현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그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맞섭니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에 접속한 후에야 이 작품이 이미 10년 전 만화로 출간된 적이 있으며 당시 꽤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한동안 머릿속이 얼얼할 정도로 이야기의 파괴력과 무게감이 대단해서 그 여운을 한참이나 만끽했는데, 아마 10년 전 만화로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 역시 비슷했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수십 년에 걸쳐 서씨 일가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 일어난 수많은 비극을 다루고 있어서 이야기의 얼개는 무척이나 복잡하게 짜여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지만 그 관계가 혐오스러울 정도로 이리저리 얽혀있는데다 그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악의와 탐욕이 워낙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탓에 이야기의 복잡함은 더욱 그로테스크한 모양새를 띄게 됩니다.
“아버지는 천하의 망종이었다. 할아버지는 살인자였다. 살인도, 강간도, 기만도, 배신도, 혈연 간의 욕망도,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독을 마시는 것까지도, 이 집안에서는 마치 돌림노래처럼 서로서로 돌아가며 저질러온 일이었다.” (p329)
비극의 연원은 수십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것들을 오늘날 수면위로 떠올려 무수한 피비린내를 진동하게 만든 것은 ‘첩의 자식’으로 서씨 일가에 들어온 준현이 일으킨 5년 전 살인사건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성폭행하고, 또 다른 자식이 그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살해한 엽기성 때문에 그 사건은 경기도 장제시를 실질적으로 지배해온 서씨 일가를 휘청거리게 만든 것은 물론 상속 구도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습니다. 준현이 출소하자 서씨 일가의 갈등은 격화되고 상속 재산을 놓고 끔찍한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준현과 나현을 향한 폭력과 협박이 난무하면서 조금씩 오랜 과거의 비밀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이 혼란 속에서 살인미수, 자살, 살인 등 일가족의 절멸을 예고하는 듯한 잔혹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진다는 점입니다.
서씨 일가는 물론 그 주위에서 증오와 악의를 키워온 인물들은 길게는 반세기, 짧게는 5년 안팎에 걸쳐 그야말로 ‘막장극 속의 악귀’들처럼 탐욕과 이기심에 사로잡혀 상대방이 가진 모든 것들을 빼앗으려 추잡한 싸움을 벌여왔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속에서 빈번히 목격되는 건 근친상간이라는 터부(taboo)입니다. 작가는 이 금지된 사랑이 가진 음습한 폭발력을 예상치 못한 대목에서 여러 번 터뜨리는데, 그 대목들은 대부분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흥미로운 반전을 품고 있어서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더 깊고 어두운 늪의 바닥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묘한 공포심과 호기심을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인물도 많고 그만큼 이야기의 갈래도 사방으로 뻗쳐있는데다 크고 작은 반전들이 마지막 장까지 연이어 배치돼있다 보니 스포일러가 될 정보가 워낙 많아서 더 상세한 줄거리를 소개하긴 곤란합니다. 하지만 ‘족쇄’는 올해 읽은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불편하고 불쾌할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 등장인물들의 악의와 그것이 빚어낸 피비린내 진동하는 잔혹한 사건들, 서로를 지키기 위해 그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다짐을 나누는 남매의 금단의 사랑, 그리고 수십 년에 걸친 악연을 정교한 설계도 위에 빈틈없이 그려냄으로써 마지막 장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게 만든 작가의 필력 등 ‘족쇄’는 추천할 이유가 수두룩한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족쇄’ 이전에 유일하게 읽은 전혜진의 작품은 전래동화와 고전소설을 모티브로 삼은 장르물 앤솔로지 ‘모던 테일’의 수록작 ‘수경-나선 미궁 속의 여자들’입니다. 당시 서평엔 “괜찮았다.” 정도의 짧은 평만 남겼는데, ‘족쇄’를 통해 관심목록에 올려놓을 또 한 명의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무척 반가웠고,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전혜진의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