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
치넨 미키토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최고급 요양병원 하야마곶 병원에 의사 실습을 나온 수련의 우스이 소마는 최악의 뇌종양을 앓고 있는 유가리 타마키(일명 유카리)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인상을 받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 속의 폭탄을 끌어안은 처지지만 유카리는 특유의 에너지로 우스이를 수시로 곤혹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족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돈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힌 탓에 삶 자체가 피폐해져있던 우스이는 어느 새 유카리에게 과거를 털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랍니다. 유카리 덕분에 망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우스이는 어느 새 그녀에게 깊은 감정을 품게 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그녀의 죽음 때문에 슬픔과 절망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런 우스이가 유카리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무엇 하나 자연스럽지 않은 유카리의 죽음의 이면에 과연 어떤 진실이 숨어있는 걸까요?

 

치넨 미키토의 작품은 대체로 현직 의사만이 그려낼 수 있는 리얼한 메디컬 서사와, 정교한 설계에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까지 깃든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경우가 많은데,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는 절절하기 이를 데 없는 로맨스의 향기까지 품고 있어서 무척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수련의 우스이는 평범한 예비 의사가 아닙니다. 가족에게 빚만 잔뜩 남기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오직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미국에서 뇌외과 의사로 성공하려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인물입니다. 유카리 역시 독특한 인물인데, 조부모에게서 천문학적인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폭탄과도 같은 뇌종양을 끌어안은 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허망함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인물로 어찌 보면 우스이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지닌 셈입니다. 제목에서부터 처연함이 느껴지는 무너지는 뇌를 끌어안고는 그런 두 인물이 삶과 죽음을 함께 고민하고 미스터리를 함께 풀어가면서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내일조차 기약할 수 없는 두 사람의 애틋한 로맨스를 그립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는 가운데 우스이는 유카리의 세심한 추리 덕분에 오랜 혐오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고, 유카리는 우스이의 진심 어린 도움 덕분에 병원 밖으로의 외출을 감행하며 삶의 희열을 느낍니다.

반면 후반부는 갑작스런 유카리의 죽음에 절망하던 우스이가 그 이면의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하야마곶 병원 사람들의 이상한 태도, 유카리의 변호사라는 자가 내보인 뜻밖의 유언장, 유카리의 거액의 유산을 탐내던 먼 친척의 수상쩍은 행동, 자신이 채 알지 못했던 유카리의 비밀스런 외출 기록 등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과 정보들이 한꺼번에 쏟아지자 우스이는 크게 당황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유카리의 죽음 뒤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진중한 주제에 절절한 로맨스까지 곁들여진 메디컬 미스터리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여운은 결코 무겁지만은 않았습니다. 섬뜩함과 처연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작품 제목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라노벨 분위기의 표지의 독특한 조합처럼 슬픔, 안쓰러움, 연민, 응원 등이 뒤섞인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맛볼 수 있습니다.

예비 의사라지만 그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할 뿐인 우스이가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방식은 형사나 탐정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가 이끌어낸 추리와 반전은 충분히 재미있고 매력적입니다. 가끔 뜻하지 않은 도움과 비약적 사고가 끼어들긴 하지만 큰 위화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입니다.

 

치넨 미키토의 작품 가운데 한국에 출간된 건 라노벨과 판타지를 비롯해서 13편뿐이지만, 일본에선 상당한 편수의 작품이 출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노벨과 판타지는 제 취향이 아니지만 메디컬과 본격까지 아우르는 치넨 미키토의 작품이 좀더 많이, 좀더 자주 한국에 소개되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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