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데스의 유산 이누카이 하야토 형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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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시청 수사1과의 이누카이 하야토와 다카치호 아스카 콤비는 인터넷을 통해 안락사를 의뢰받고 실행에 옮기는 이른바 닥터 데스를 쫓습니다. 안락사한 인물만 12명에 달하지만 그 누구도 닥터 데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이누카이와 아스카의 수사는 답보 상태에 머뭅니다. 세간에선 닥터 데스의 행위에 대해 거센 논란이 벌어집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닥터 데스를 옹호하지만, 반대편에선 그를 쾌락 살인마로 비난하며 안락사 자체를 거부하는 주장을 폅니다. 신부전으로 장기입원 중인 딸 사야카가 겪는 고통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품게 됩니다. 그래선지 이누카이는 수사1과 동료들과의 협업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수사에 몰두합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는 사회파 메디컬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그동안 의료 문제가 얽힌 지독한 사건들을 다뤄왔습니다. 시리즈 첫 편인 살인마 잭의 고백은 장기 이식과 관련된 연쇄살인사건을, ‘하멜른의 유괴마는 자궁경부암 백신과 관련된 연쇄 유괴사건을 다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나카야마 시치리가 정면으로 도전한 건 안락사 문제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의뢰를 받아 비밀리에 안락사를 시행하는 닥터 데스를 쫓는 이야기인데, 나카야마 시치리는 적극 찬성’, ‘혼란 속 고민’, ‘적극 반대등 안락사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인물을 등장시켜 예민하고도 현실적인 주제를 미스터리 속에 잘 녹여 넣었습니다.

 

이누카이 하야토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토대는 주인공 이누카이의 딸 사야카가 신장이식 외에는 치료법이 없는 신부전으로 고통 받으며 장기입원 중이라는 설정입니다. 즉 다른 사건은 몰라도 의료와 관련된 사건들은 이누카이에게는 남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행위는 이누카이로 하여금 딸 사야카가 장기이식을 받지 못한 채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을 겪게 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곤혹스런 자문을 연이어 던지게 만듭니다. 경찰로서의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를 처벌 받아야 할 살인범으로 여기지만, 아버지로서의 이누카이는 그의 행위에 일정 부분 동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닥터 데스에 의해 안락사한 인물들이 하나 같이 편안한 표정으로 숨을 거뒀고, 유족들이나 주변 인물들 역시 당사자가 더는 고통 없는 세상으로 가게 됐다며 안도와 위안을 느끼는데,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누카이는 닥터 데스는 정말 단순한 쾌락살인자일까. 어쩌면 종말기 연명치료의 숨은 선구자는 아닐까?”라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답게 나카야마 시치리는 안락사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들을 직격합니다. 눈앞에 닥친 초고령화의 문제라든가 안락사를 회피할 수밖에 없는 의료계의 현실, 죽을 권리를 빼앗긴 채 지독한 통증과 고액의 치료비를 감당해야 하는 종말기 환자들의 고통 등 결코 남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해 과감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합니다. 그래선지 닥터 데스의 유산은 팔색조 스타일의 변화구 같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전작들과는 달리 오직 정면만 바라보고 날아가는 돌직구처럼 느껴집니다. 물론 막판의 큰 반전을 포함하여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재미라는 요소가 잘 살아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안락사 문제를 더는 회피할 수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긴 르포 스타일의 미스터리로 읽힌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안락사에 관해 적극적인 찬성 입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닥터 데스가 실제로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페이지를 넘기곤 했습니다. 특히 닥터 데스의 안락사는 살 권리 못잖게 중요한 죽을 권리를 존중하는 행동으로 보였는데, 전쟁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중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단 한 발의 총알로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나카야마 시치리 특유의 화려하고 속도감 넘치는 반전 미스터리와는 살짝 거리가 있지만 공론화와 문제제기가 반드시 필요한 안락사 논쟁을 다루고 있어서 몰입감이나 공감의 폭이 훨씬 더 깊고 넓었던 작품입니다. 안락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찾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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