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의 비극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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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하카마 시의 새 시장은 ‘I(출신지와는 다른 지역으로의 이주) 프로젝트’, 6년 전 유령 마을이 된 미노이시(蓑石)를 부활시키기 위해 외지에서 이주자를 모집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모집과 관리를 담당할 소생과(蘇生課)라는 전대미문의 부서를 만듭니다. 엘리트 코스를 밟던 공무원 만간지 구니카즈는 자신이 왜 이런 황당한 부서에 배치됐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만 칼퇴근에만 진심인 니시노 과장과 학생 티를 못 벗은 신입 간잔 유카까지 단 세 명이 미노이시를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12가구를 유치했지만 프로젝트는 시작부터 삐걱거립니다. 쉴 새 없이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 무사히 정착하기를 바랐던 이주민들이 한두 명씩 미노이시를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은 더 이상 낯선 뉴스도 아니고 남의 나라 이야기도 아닙니다. 간혹 한국과 일본의 지방 가운데 성공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회복된 곳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은 있지만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미미한 숫자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의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현명할까요? 대처라는 것 자체가 가능하긴 할까요? 요네자와 호노부는 미노이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이 어려운 질문들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미 6년 전에 소멸된 미노이시에 적잖은 예산을 투자하여 이주자를 정착시키겠다는 프로젝트는 언뜻 바람직하고 진취적인 정책처럼 보이지만, 엘리트 공무원 만간지의 눈에는 기적을 바라는 정치 쇼로 보일 뿐입니다. 하지만 막상 이주가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관리가 시작되자 본성 자체가 성실한 공무원인 그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후배 간잔과 함께 이주민들을 위해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생활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연이어 사건과 해프닝이 벌어지고, 이주민들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자 크게 당황합니다.

 

서장과 종장을 제외하고 6편의 연작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각 단편은 이주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일상 미스터리를 그립니다. 물론 해결사는 만간지를 비롯한 소생과 직원들입니다. 하지만 각 사건의 해결이 해피엔딩, 행복한 미노이시로 이어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어렵게 구한 입주민들을 떠나게 만들거나 소생과 직원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과연 ‘I턴 프로젝트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현실성이 있는 계획인지, 이런 식으로 부활시킨 유령 마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주인공 만간지는 수시로 딜레마에 빠집니다. 불평을 하면서도 미노이시의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바람직한 공무원만간지의 모습이 딜레마의 한쪽이라면, 나머지 한쪽은 개선될 여지가 없는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는 합리주의자만간지의 모습입니다. 즉 구급차나 소방대가 도착하는 데만 40분이 걸리고, 한정된 예산 때문에 마을을 지탱하기 위한 필수 시스템 구축마저 어려운 상황은 만간지를 숱한 고민 속에 몰아넣습니다. 특히 도쿄에 사는 동생이 미노이시의 프로젝트를 깊은 늪이라고 비난했을 때 만간지의 고민은 극에 달하고 맙니다. (다 읽은 뒤 가장 인상 깊게 남은 단어도 바로 이 깊은 늪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반부터 제목이나 주제에 비해 다소 가벼워 보이는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돼서 무척 의외였습니다. 꽤 무거운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는데, 만간지와 소생과 직원들 캐릭터도 어딘가 만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고,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도 진지하게 새 거주지와 삶을 고민하는 모습보다는 왠지 뜨내기나 오타쿠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설정들은 마지막 챕터인 종장에서 뜻밖의 반전과 함께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무겁게 전개됐더라면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졌을 이 작품의 주제가 요네자와 호노부 특유의 가볍지만 선명한 이야기 덕분에 더욱 생생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껏 인구감소와 지방소멸에 관한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무심결에 어떻게 하면 저곳을 되살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 게 사실인데, ‘I의 비극은 그런 저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은 작품입니다. 정의감, 동정심, 이상주의 같은 감상적인 태도로 접근할 게 아니라 지독히도 현실적이고 냉정한 관점이 필요한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만간지의 고뇌와 갈등이 고스란히 공감되듯 느껴지는 것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미노이시는 과연 깊은 늪일까요? 아니면 재도전의 가치가 있는 미완의 프로젝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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