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의 살인 첩혈쌍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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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행성 테로스와의 충돌로 지구가 멸망하기까지 두 달여밖에 남지 않은 20341231일의 후쿠오카현 다자이후. 멸망 예고 후 아버지는 자살했고 어머니는 집을 나갔으며 남동생 세이고는 히키코모리가 된 탓에 23살의 고하루는 거의 혼자가 되고 말았지만 오늘도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교습소를 방문합니다. 멸망이 코앞이지만 그녀에겐 꼭 이뤄야 할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차에 올라타기도 전에 고하루와 운전강사 이사가와는 차량 트렁크에서 참혹하게 살해된 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사방에 자살한 시신이 널린 지경이지만 범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여성의 시신을 감추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하루를 더 놀라게 한 건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며 이미 무용지물이 된 경찰서로 향하는 운전강사 이사가와의 태도였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그녀의 신참 보조비서 로지가 윈저성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미스터리(‘윈저 노트, 여왕의 비밀 수사 일지’), ‘각성하는 시스터 후드라는 부제가 붙은 바바야가의 밤에 이은 북스피어의 첩혈쌍녀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멸망을 앞둔 지구에서 살인사건 수사를 벌이는 두 여성의 활약을 그린 세상 끝의 살인은 제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이자 역대 최연소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멸망을 앞둔 후쿠오카의 분위기와 사정은 비슷한 설정의 여타 장르물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약탈과 방화, 강력범죄가 횡행하고 비관에 빠진 나머지 자살한 자들이 지천입니다. 소행성 충돌지점이 후쿠오카와 가까운 구마모토로 발표되자 일본에선 해외로의 탈출이 줄을 이었고 이제 도심에서도 인적이나 차량을 찾아보기 힘든 상태입니다.

하지만 독자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건 이 와중에 운전면허를 따겠다며 교습소를 다니는 고하루와 무슨 이유에선지 홀로 남아 고하루를 가르치는 운전강사 이사가와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다 죽을 텐데 왜 살인을 저질렀을까?”, “어차피 범인도 죽을 텐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수사에 나서는 걸까?”라는, 주인공들과 범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고하루와 이사가와를 긴장하게 만든 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시신들이 후쿠오카현 여기저기서 발견된 점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들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있음을 파악한 두 사람은 좀더 절실한 마음으로 진범 찾기에 나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들이 두 사람과 합류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을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잔류촌을 발견하기까지 합니다.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잠시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잊기도 하지만 얼마 후 고하루는 이사가와의 입에서 튀어나온 진범의 이름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함께 살인사건 수사에 나서긴 하지만 고하루와 이사가와는 전혀 다른 캐릭터입니다. “광기에 가까운 정의감으로 폭주하는 강사와 모든 걸 체념하고 차가운 관점을 견지하는 주인공이라는 소설가 시바타 요시키의 평대로 오히려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사가와가 악은 무조건 응징해야 한다는 과도한 정의감에 사로잡힌 다혈질이라면 고하루는 일찌감치 운명을 받아들이곤 자신이 사랑하는 별을 바라보며 종말을 맞기 위해 구마모토 천문대로 갈 것을 꿈꾸는 여린 인물입니다. 일본에서 탈출하지 않은 이유도 제각각이고, 도덕이나 정의에 대한 관념도 지극히 다릅니다.

그런 두 사람이 희대의 살인마를 잡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연대하기도 하는 모습은 임박한 지구 멸망이라는 배경 속에서 더 극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거듭되는 반전을 통해 오해가 풀리고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도 두 사람은 갈등과 화해와 협력을 나누며 그리 오래 나눌 인연은 못 되더라도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 소설답지 않게 이토록 뒷맛이 산뜻한 소설이라는 편집자 삼송 김사장 님의 마지막 코멘트는 이 작품의 분위기를 잘 압축해놓은 한 줄 평이란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구 멸망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세상 끝의 살인은 미스터리의 매력과 종말 서사의 미덕이 잘 배합된 작품이라 한 번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장르에 대한 편견이 끝내 해소되지 않아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23살에 대기록을 세우며 데뷔한 아라키 아카네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가지려고 합니다. 20238월에 두 번째 작품 ちぎれた이 일본에서 출간됐다고 하는데 혹시 기회가 닿는다면 북스피어를 통해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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