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카틀리포카
사토 기와무 지음, 최현영 옮김 / 직선과곡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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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동부의 마약 카르텔 로스 카사솔라스가 경쟁 카르텔의 공격으로 궤멸당합니다. ‘로스 카사솔라스4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발미로는 멕시코를 탈출하여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자리를 잡습니다. 언젠가 경쟁 카르텔에게 복수할 날을 기다리며 자금과 무기를 끌어 모으던 발미로 앞에 한때 최고의 심장혈관 외과의사였지만 지금은 신분을 숨기고 장기 밀매 코디네이트로 암약중인 일본인 스에나가 미치쓰구가 나타납니다. 신념도, 사상도, 목표도 달랐지만 발미로와 스에나가는 중국, 일본, 자카르타의 폭력조직을 등에 업은 채 전대미문의 피의 비즈니스를 런칭시킵니다. 그 비즈니스의 핵심은 살아있는 자에게서만 얻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장기인 심장입니다. 피비린내 없이는 불가능한 그 비즈니스에 위험천만한 인물들이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에는 불온한 기운이 만연하기 시작합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묘한 기운을 내뿜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은 단순히 마약과 심장을 둘러싼 요란하기만 한 액션 스릴러물은 아닙니다. 물론 핵심은 발미로와 스에나가가 벌이는 피의 비즈니스’, 즉 심장 밀매사업이지만, 방대한 분량의 대부분은 그 사업의 이면에 할애됩니다. 특히 꽤 많은 등장인물들의 굴곡진 전사(前史)가 상세히 기술되고, 그중에서도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발미로를 통해 16세기에 멸망한 아스테카 문명과 그들이 숭배했던 신들이 자세히 소개됩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테스카틀리포카는 아스테카 문명 최고의 신의 이름으로, 발미로의 정신과 행동을 지배하는 세계관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피의 비즈니스를 이끄는 발미로와 스에나가의 유일한 공통점은 바로 심장입니다. 과거 아스테카 문명은 최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희생제물의 심장과 왼팔을 바쳤습니다. 마약 카르텔을 이끌던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을 무대로 새 비즈니스를 시작한 현재도 적과 배신자를 향해 무자비한 공격을 퍼붓는 발미로의 마지막 의식은 항상 테스카틀리포카를 향한 인신공양입니다. 살아있든 이미 죽었든 적의 가슴을 가르고 흉골을 부순 뒤 심장을 꺼내 그 자의 얼굴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에게 테스카틀리포카와 심장은 신성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런 발미로가 심장 밀매사업을 통해 복수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려 한다는 건 역설적이면서도 더욱 잔혹함을 발휘하는 설정입니다.

한때 최고의 심장혈관 외과의사였지만 도망자 신세가 되어 자카르타에서 장기 밀매 코디네이터로 전락한 스에나가의 유일한 꿈은 언젠가 제대로 된 수술대 앞에 의사로서 다시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으로의 복귀도, 실명을 건 개업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가 심장을 다시 만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장 밀매사업뿐입니다. 다시 의사가 되기 위해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셈입니다. 이는 발미로 못잖게 역설적이면서도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미로와 스에나가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멕시코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히지카타 코시모입니다. 10대의 나이에 2m가 넘는 거구를 지닌 그는 부모를 살해한 죄로 복역을 마친 뒤 발미로의 눈에 띄어 그의 수하가 됩니다. 하지만 마치 백지와도 같은 그의 정신세계는 한편으론 순진무구하면서도 한편으론 공감 능력이 완벽하게 결여된 사이코패스의 그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발미로가 들려주는 아스테카 문명과 테스카틀리포카의 전설은 코시모에게는 아무것도 걸러지지 않은 채 날것 그대로 주입됩니다.

 

독자에 따라 이야기 전반에 깔려있는 아스테카 문명과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한 서사가 낯설거나 불편하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을 텐데, 저 역시 종종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마약 카르텔을 주도하며 지극히 현실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아왔던 발미로의 내면에 이토록 지독한 숭배심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쉽게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내면이 아스테카 문명과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잠식된 사연이 디테일하게 소개되고 있고, 스에나가를 비롯한 중요한 조연들이 저울 맞은편에서 이야기의 현실감의 균형을 잡아준 덕분에 낯설고 불편한 느낌을 어느 정도는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이 참혹한 광경을 견뎌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며 책을 놓고 싶더라도 마지막까지 읽어야 한다.”는 알라딘 MD 권벼리의 추천사는 수위가 꽤 높은 폭력적인 장면뿐 아니라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아스테카 문명과 테스카틀리포카에 대한 묘사까지 감안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은 아니지만 부지불식간에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묘한 몰입감을 발휘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요란한 액션 스릴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여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도 분량도 쉽지 않아 보이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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