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노이치인법첩 인법첩 시리즈 (소설)
야마다 후타로 지음, 김소연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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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공격으로 오사카성이 함락되고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하기 직전, 명장 사나다 유키무라는 시나노 닌자술을 구사하는 다섯 명의 쿠노이치(여자 닌자)에게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후손을 임신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히데요리의 아내이자 이에야스의 손녀인 센히메의 시녀가 되어 어떻게든 살아남아 아이를 출산할 것을 당부합니다. 후일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도모하려는 최후의 비책입니다. 이에야스의 손녀지만 남편 히데요리를 사랑한 나머지 스스로를 도요토미 가문의 사람으로 여기는 센히메는 전쟁 와중에 이에야스 측 장수에 의해 구출되지만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쿠노이치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아버지 이에야스와 대적할 각오를 공공연하게 밝힙니다. 밀정을 통해 이 정보를 얻은 이에야스는 이가(いが) 닌자의 정예 다섯 명을 불러들여 쿠노이치들을 죽이고 센히메를 데려올 것을 지시합니다.

 

일본 대중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야마다 후타로의 인법첩 시리즈는 장편과 단편을 포함하여 수십 편에 이르는 이른바 닌자 소설입니다. 2023년에 AK커뮤니케이션즈에서 모두 다섯 편의 작품을 출간했는데, 소재나 줄거리 모두 눈길을 끌어서 그 가운데 한 편인 쿠노이치인법첩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습니다.

 

히라가나와 가타가나가 섞여 있긴 하지만 쿠노이치의 일본어 표기는 くノ입니다. 한자 를 해체한 표기로 여자를 의미하는 닌자의 은어라고 합니다. 즉 이 작품의 제목은 여자 닌자의 기술을 기록한 책이란 뜻입니다. 제목과 줄거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주인공은 할아버지 이에야스와 적대시하면서까지 도요토미 가문의 부흥을 도모하는 센히메와 그녀를 지키며 히데요리의 자식을 출산하려는 다섯 명의 임신한 쿠노이치입니다. 그리고 이에야스의 지시를 받고 쿠노이치를 제거하려는 전통적인 닌자 가문 이가(いが)의 다섯 명의 정예가 상대역으로 등장합니다.

 

말하자면 남녀 닌자가 팀 배틀을 벌이는 셈인데, “()의 극치에서 펼쳐지는 처절하고 기발한 닌자술 전쟁이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열 명의 닌자가 지닌 각각의 특별한 능력은 대부분 성과 관계된 것이라 이 작품이 19금 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관능적이고 적나라하고 폭력적으로 묘사됩니다. '쿠노이치 화장(化粧)', '천녀패(天女貝)', '관 말리기', '인조(人鳥)끈끈이' 등 명칭부터 묘해 보이는 닌자술은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욕보인 뒤 목숨을 빼앗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야말로 상대방의 정()과 혈()을 남김없이 파괴하고 메마르게 한다고 할까요? 단순히 은밀한 움직임과 뛰어난 칼 재주로 상대를 죽이는 기술을 넘어 신비한 마술사의 능력까지 지닌 게 이 작품 속 닌자의 특징입니다.

 

다른 인법첩 시리즈는 안 읽어서 모르겠지만 쿠노이치인법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손녀 센히메를 비롯하여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팩션(Faction)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였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작품의 배경인 1615년 오사카 전투에 관해 조금만 검색해보면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얼마나 정교하게 픽션과 연결시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도쿠가와 가문에서 태어나 7살에 도요토미 가문으로 시집을 갔고, 이후 할아버지 이에야스가 멸망시킨 도요토미 가문을 위해 분투하는 센히메는 일본 대하드라마나 여러 가지 픽션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그려질 만큼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남편 히데요리를 살려달라고 이에야스에게 간절히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라는 게 역사적 사실로 보이는데 이 한 줄을 이용하여 이토록 강렬한 캐릭터를 만들어낸 건 그저 대단해 보일 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협지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인법첩 시리즈닌자가 활약하는 무협지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중독성이 강한 오락물이라 취향이 맞는 독자라면 시리즈를 모두 탐독할 것 같은데, 다만 (다른 작품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폭력성과 선정성이 심하고 잔혹한 묘사들이 많아서 미리 참고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이 시리즈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1960년대에 출간됐습니다. 개인적으론 원작의 맛을 잘 살린 듯한 고어체 번역이 무척 좋았는데, 독자에 따라 살짝 낯선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읽다 보면 고어체 특유의 매력을 맛볼 수 있으니 익숙해질 때까지 조금만 참아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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