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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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면 가을비 이야기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농락당하고 고통 받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공포 기담집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각각 전생과 현생, 꿈을 꾸는 중에 벌어지는 순간이동, 초절기교의 여가수가 남긴 희귀 음반의 비밀, 그리고 동전을 이용해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 고쿠리상 등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귀의 논

사원여행에 온 미하루는 평소 관심 있던 아오타와 함께 새벽 산책에 나섭니다. 괜찮은 스펙을 가진 그가 지금껏 연애를 한 번도 못해봤다는 말이 믿기지 않지만, 그 이유를 들은 미하루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건 아오타의 전생 이야기이자 지옥에 떨어진 아귀에 관한 것입니다.

 

푸가

종적을 감춘 작가 아오야마 때문에 화가 난 편집자 마쓰나미는 그의 비서로부터 미완성 원고 푸가를 전달받습니다. 그것은 아오야마가 겪은 실화를 기록한 것으로 꿈을 꾸는 중에 벌어지는 순간이동에 관한 것입니다. 마쓰나미는 원고를 읽을수록 극도의 공포에 휩싸입니다.

 

백조의 노래

20세기 초 단 한 장의 사제 앨범만 남긴 채 요절한 일본계 소프라노 미쓰코 존스에게 반한 사가 헤이타로는 미국 음반계의 거장을 통해 그녀의 발자취를 조사할 탐정을 구합니다. 인간의 목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절대고음과 초절기교는 물론 동시에 두 가지 목소리를 내는 능력을 지녔지만 그 능력 뒤엔 미쓰코 존스가 겪어야 했던 불행과 공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고쿠리상

18년 전, 다쿠야를 포함한 네 명의 초등학생은 자신에게 닥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령 스폿인 폐병원에서 이른바 고쿠리상 어둠의 버전을 실행합니다. 고쿠리상의 조언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은 그들은 18년이 지난 후 다시금 고쿠리상 어둠의 버전을 실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받은 고쿠리상의 조언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립니다.

 

네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지독한 절망과 불운에 사로잡혀있습니다. 누군가는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하지만, 누군가는 발버둥치거나 헤어나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절망과 불운에 이어 그들을 덮친 극한의 공포는 논리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인데다 마치 태어나기 전부터 부여받은 업보와도 같아서 어떤 식으로 대응하든 비극적인 결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 결말을 더욱 서늘하게 만드는 (매 수록작마다 수시로 등장하는) 가을비는 마치 기분 나쁘게 들러붙은 이세계의 유령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네 편 모두 명백한 현실믿을 수 없는 비현실이 조합된 이야기들인데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세상에선 절대 벌어질 일 없는 픽션 속 호러가 아니라 지극히 사실적이고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것만 같은 미묘한 인상을 남깁니다. 동시에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과 끈적거림도 느끼게 되는데 굳이 비유하자면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의 뒷맛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읽는 내내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이 수시로 떠오르곤 했는데, 오래 전에 읽어서 서평도 남기지 못한데다 내용도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그때 뇌리에 각인된 사실감+불쾌감이 이 작품을 읽는 동안 갑자기 활성화된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취향의 호러는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으스스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어서 꽤 흥미로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책장에 방치된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 몇 편 있는데, ‘가을비 이야기덕분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연이어 읽는 건 곤란할 것 같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마다 한 편씩 구출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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