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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의의 대담
후지사키 쇼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22년 6월
평점 :
특수설정 미스터리를 비롯하여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최근 몇 년간 일본 미스터리에서 두드러지는 가운데, 이번엔 ‘대담 미스터리’라는 희한한 장르가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담은 작품들이 대부분 억지에 가까운 설정들로 인해 실망감만 남긴 탓에 ‘살의의 대담’ 역시 비슷한 아류라고 내심 짐작했고, 한두 챕터만 읽어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접을 생각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툭 터놓고 고백하자면 첫 챕터는 의외로 재미있었지만 두 번째 챕터는 다소 평범했습니다. 결국 딱 한 챕터만 더 읽어보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예상과 달리 그 길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단번에 달리고 말았습니다.
모두 7개의 챕터로 구성돼있는데(6편의 대담과 에필로그), 각자 독립적인 이야기를 담은 단편 같지만 실은 7편 모두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돼있었습니다. 영화 여주인공과 원작 소설가, 국가대표 공격수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두 축구선수, 5년 만에 오리콘 차트 1위에 오른 3인조 밴드, 종방을 앞둔 드라마의 세 주인공, 그리고 이들의 대담을 진행하는 프리랜서 기자 등 다양한 인물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대담에 임하지만, 이들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연결돼있습니다. 그리고 대담이 진행될수록 불온한 기운이 고조되고 대담자들은 상대를 향해 심각한 살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그것이 단순한 의지에 그치지 않고 참혹한 살인사건으로 구체화된다는 점입니다.
좀처럼 보기 드물게 ‘살의의 대담’의 본문은 검은색과 빨간색의 활자로 인쇄돼있습니다. 검은색이 실제 대담 내용이고, 빨간색은 ‘대담자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상대를 칭찬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대담 내용과 달리 ‘마음의 소리’는 악의와 증오로 가득 차있으며 그것들은 이내 무시무시한 살의로 진화됩니다. 단순한 악의가 살의로 몸집을 키우고, 그것이 실제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은 독자에게 빨간 글자색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각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 묘사뿐 아니라 구체적인 복선과 트릭도 풍부하게 가미돼서 페이지를 넘길수록 도대체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에서 작가가 직접 “익숙해질 때까지는 다소 읽기 불편할 수도...”라고 미리 양해를 구할 정도로 독특한 형식인데다, ‘살의’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인지 훨씬 더 분량이 많은 ‘마음의 소리’가 빨간색으로 인쇄된 탓에 눈이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만, 속도감도 엄청 빠르고 여러 사람의 살의가 내뿜는 긴장감도 팽팽해서 한번 가속이 붙으면 마지막 장까지 좀처럼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대체 몇 번인지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되풀이되는 반전의 연속에 어쩌면 나가떨어질지도...”라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막판에 몰아치는 연이은 반전은 이 작품이 단순한 ‘대담 미스터리’가 아니라 무심하면서도 정교하게 쌓아올린 뒤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매력적인 미스터리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 많은 인물들의 살의와 살인계획을 빈틈없이 직조한 뒤 연이은 반전을 통해 예상치 못한 엔딩을 끌어낸 작가의 필력은 초반에 느낀 싱거움을 120%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2014년 ‘神様の裏の顔’(신의 숨겨진 얼굴)로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후 10편 이상의 작품을 내놓았지만 한국에는 이 작품으로 처음 소개된 후지사키 쇼의 다른 작품들이 너무 궁금해졌는데, 머잖아 ‘살의의 대담’ 못잖은 재미와 완성도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