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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ㅣ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상해치사로 복역 중 가석방된 27세 미카미 준이치는 교도소 간수장 난고 쇼지로부터 의외의 제안을 받습니다. 익명의 독지가가 거액의 성공보수를 내걸고 사형수 사카키바라의 무죄 입증을 의뢰해왔는데 그 일을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피해자 유족에게 엄청난 배상을 하느라 집안이 몰락한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던 준이치는 순전히 거액의 성공보수만 보고 뛰어들었지만, 조사를 진행하면 할수록 누군가 사카키바라에게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형집행까지는 단 3개월. 준이치는 난고와 함께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리고 난고가 왜 이 일을 맡은 건지, 또 자신을 끌어들인 이유가 뭔지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뷔작이자 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인 ‘13계단’을 처음 읽은 건 일본 미스터리에 막 빠져들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입니다. 미미 여사와 히가시노 게이고로 입문한 뒤 일본 작가들에게 관심을 두던 중 ‘13계단’을 읽고 다카노 가즈아키에게 반해 그 뒤로 ‘그레이브 디거’, ‘6시간 후 너는 죽는다’, ‘제노사이드’까지 연이어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애매한 기억만 남아있었지만 오랜만에 다시 읽은 ‘13계단’은 에도가와 란포상 만장일치 수상작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대단한 힘과 재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골자는 주인공들이 한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는 전형적인 ‘원죄 미스터리’지만, ‘13계단’의 가장 큰 특징은 두 주인공이 각각 가석방된 상해치사범과 교도소 간수장이란 점입니다. 준이치의 경우 우발적인 몸싸움 끝에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있는 살인자입니다. 간수장인 난고의 경우 두 번의 사형집행에 참여했던 트라우마, 즉 합법적인 과정이긴 했어도 “사람을 죽였다.”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형수의 무죄를 밝혀내는 미션을 ‘사람을 죽인 적 있는 두 사람’이 수행한다는, 무척 역설적인 설정인 셈입니다.
이와 같은 주인공 캐릭터는 흔한 원죄 미스터리를 넘어 사형제도 전반에 대한 통찰과 죄인에 대한 극단적인 대처법(처벌 vs 갱생)에 대한 논쟁 등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하고도 의미 있는 설정입니다. 교도소 간수장인 난고는 두 번의 사형집행 이후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다가 가정이 깨질 위기까지 겪었고, 스스로도 더 이상 간수장으로 일할 마음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런 난고가 사표를 낼 각오로 사카키바라의 무죄 입증 의뢰를 받아들인 건 그를 구함으로써 과거 ‘두 번의 살인’을 속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공보수만 바라고 가담했던 준이치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죗값을 새삼 절감하는 한편 사형제도의 모순이라든가 “갱생이란 가능한가?” 등 스스로에 대해 수없이 자문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두 주인공의 활약과 함께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하냐?”는 사형제도에 관한 1차적인 논란은 물론 사형집행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검찰, 법원, 법무부 관료, 교도소 관계자)이 겪는 고뇌와 갈등까지 다루고 있어서 주제의 폭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또한 제목에 들어간 13이란 숫자는 “사형 판결 선고 이후 집행까지의 절차 횟수이자 사형집행 서류에 결재할 관료들의 인원 수”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를 더없이 잘 반영한 제목이란 생각입니다.
주제의식을 강하게 소구하는 작품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13계단’이 딱딱하고 재미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긴박한 상황과 예측불허의 반전들, 그리고 뒤늦게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 등 미스터리의 재미에 관한 한 별 다섯 개도 부족할 만큼 뛰어난 작품입니다. 준이치와 난고는 거듭 유력한 범인을 추정하지만 번번이 막다른 장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경찰의 추격을 받기도 하고, 진상을 밝혀낸 순간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대목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절묘하고 진하게 배어있습니다. 말하자면 재미와 주제의식이 가장 이상적으로 배합된 작품이라고 할까요?
서평을 남기지 못했거나 남기긴 했어도 읽은 지 한참 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몇몇 작품들을 계속 읽어나갈 생각입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2013년 ‘KN의 비극’을 마지막으로 그의 작품이 더는 한국에 소개되지 않아서 무척 아쉬운데, 이미 읽었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그 아쉬움들을 달래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