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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엔딩 크레딧 ㅣ 이판사판
안도 유스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4월
평점 :
드라마나 영화는 메이킹 필름을 비롯해서 여러 방식으로 제작현장이 공개된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고가 깃들었는지 널리 알려졌지만, 책의 경우 작가와 편집자 외엔 딱히 곧바로 떠오르는 사람이나 일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완성된 원고가 독자에게 전해지기 위해선 ‘인쇄’를 통해 ‘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제작되는 것이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독자는 인쇄란 “작가의 원고를 기계가 찍어내는 일 아닌가?”라고 여깁니다. 이 작품의 작가인 안도 유스케조차 십여 권의 작품을 집필하는 동안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몰랐다고 고백할 정도였으니 일반독자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에 무수한 제작진의 이름이 올라가는데 그걸 우리는 엔딩 크레딧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End Roll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인 ‘책의 엔딩 크레딧’은 원제인 ‘本のエンドロール’을 그대로 직역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아마도 작가는 “책에도 엔딩 크레딧이 있다면 한 권의 책을 만드는데 기여한 수많은 이름과 그들의 일을 독자에게 알릴 수 있을 텐데.”라는 아쉬움과 바람을 담아 제목을 지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주목한 건 바로 ‘인쇄’입니다. 이 작품에는 물과 기름처럼 가치관이 판이한 인쇄회사의 영업맨들과 실제로 공장에서 일하는 다양한 인쇄기술자들이 주연으로 등장합니다. 책에 관한 소설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작가와 편집자도 등장하지만 이번에는 기꺼이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단역 혹은 조연의 자리로 물러섰습니다.
대형인쇄회사에서 식품패키지 영업을 하던 우라모토 마나부는 오로지 책을 만들고 싶은 소망에 훨씬 작은 규모의 도요즈미인쇄로 이직했습니다. 그는 인쇄가 모노즈쿠리(혼신의 힘을 쏟아 최고의 물건을 만드는 것 혹은 그 장인)로 인정받는 것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로 “인쇄는 책을 만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덕분에 그와는 정반대로 냉정하고 합리적인데다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 일”이라고 단언하는 톱 세일즈 영업맨 나카이도 고지에게 늘 쓴 소리를 듣곤 합니다. 또 고객(작가와 편집자)이 제멋대로 변덕을 부려도 반론 한 번 제기 못한 채 인쇄공장에 그대로 전달하곤 해서 뛰어난 인쇄기술자이자 자신의 일을 “정해진 색깔의 잉크를 종이에 찍는 것뿐”이라고 여기는 노즈에 마사요시에게 ‘전서구’라는 모욕적인 별명까지 얻습니다.
그 외에도 어릴 때부터 따돌림을 당하다가 책에서 위안을 얻은 끝에 디지털 인쇄판을 짜는 오퍼레이터가 된 후쿠하라, 잉크에 관한 최고 전문가인 40년 경력의 지로, 괴짜 북 디자이너 우스타, 정년을 1년 앞둔 베테랑 기술자 규, 그리고 책과 독자를 연결해주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아르바이트 서점 점원 모리타 등 책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지만 정작 독자 눈엔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갑니다.
‘책의 엔딩 크레딧’은 이상주의 영업맨 우라모토, 합리주의 영업맨 나카이도, 냉정한 인쇄기술자 노즈에의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냉소적으로, 때로는 무자비하게 서로의 신념을 들이밀던 세 사람은 숱한 위기와 갈등을 함께 겪어내며 점차 상대방을 이해하고 존중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세 사람 모두 책에 대한 애정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성장의 핵심은 인쇄는 책을 ‘찍어내는’ 일이 아니라 ‘만드는’ 일이며, 단지 이상에만 빠져있을 게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실수 없이 마무리해야 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을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양산업이라 불릴 정도로 출판계는 불황을 헤매고, 전자책의 급성장이 갖고 온 종이책의 위기는 날로 심각해지지만 책에 관한 그들의 열정만큼은 조금도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독자는 몇 번이고 울컥해지는 기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읽어온, 지금 읽고 있는, 그리고 앞으로 읽을 책들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과 함께 말입니다. 이 느낌을 너무나도 잘 대변한 알라딘의 소설 MD 권벼리 님의 글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습니다.
“책을 만들고 책을 판매하는, 책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책은 언제나 지친 마음에 따뜻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울고 웃으며 읽은 이 책에서도 큰 위로를 받았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져 독자의 손에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그 여정 속에 있을까. 책의 뒤편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족으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독자뿐 아니라 ‘책을 만드는 사람들’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가끔 수두룩한 오타, 아무데서나 갖다 쓴 듯한 표지 디자인, 페이지가 뒤바뀐 인쇄 등 성의 없이 만든 책 - 우라모토 말에 따르면 “어쩔 수 없이 나온 책” - 을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낭만적인 판타지라고 치부할지도 모르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치열하고 열정적인 이야기는 현실에서 책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비판이자 따뜻한 격려가 돼줄 거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