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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유괴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3월
평점 :
1970년대 중반, 일본 총리공관으로 전대미문의 협박전화가 걸려옵니다. 일본 국민 1억 2천만 명을 납치했으니 방위비 1년 예산에 해당하는 5천억 엔을 몸값으로 내놓으란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후 젊은 커플이 ‘묻지마 살인’ 방식으로 살해당하고, 이어 전국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자신들을 블루 라이언스라 칭한 범인들은 예측 불가능한 행보로 경찰을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물론 일본 전체를 패닉 상태에 빠뜨립니다. 경시청 수사1과의 야베 경부는 첫 사건의 목격자이자 천재 탐정인 사몬지 스스무에게 은밀한 협조를 요청합니다. 아내이자 비서인 후미코와 함께 조사에 뛰어든 사몬지는 작은 단서를 통해 범인의 윤곽을 흐릿하게나마 포착하지만 매번 기발한 행보를 보이는 그들을 따라잡는 건 그저 요원해 보일 뿐입니다.
일본의 국민 미스터리 작가로 불렸고 지난 3월 92세의 나이로 타계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입니다. 약 700편의 작품을 발표한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소개된 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서 그런지 저 역시 ‘살인의 쌍곡선’(1971년 작)이 유일하게 읽은 그의 작품입니다.
‘화려한 유괴’는 1977년에 출간된 작품으로 “천재 범죄집단 vs 천재 명탐정의 불꽃 대결”이란 출판사 홍보카피대로 전대미문의 범죄를 저지른 천재들(블루 라이언스)과 그들에 맞먹는 천재성을 지닌 ‘파란 눈의 일본인 탐정’ 사몬지 스스무의 대결을 그립니다.
일본 국민 전체를 납치했다고 선언한 범인들은 ‘누가 죽어도 상관없는’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며 총리에게 천문학적인 금액을 요구합니다. 애초 총리가 줄 수 있는 돈도 아니고, 준다고 해도 받아갈 방법도 전무한 불가능한 요구에 모두가 의아해하지만 이미 작은 단서에서 범인들의 윤곽을 파악한 사몬지는 범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따로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야기는 천재 범죄집단과 천재 탐정 사이의 고도의 심리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범죄심리학을 전공하고 탐정으로 일한 적도 있는 사몬지가 이 사건에서 가장 큰 무기로 삼은 것은 천재의 강점과 약점을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자신이 천재인 덕분에 같은 천재의 자부심과 우월감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약점까지도 내다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애초 일본 국민 전체를 납치하겠다는 발상 자체도, 또 순식간에 전략을 바꿔가며 자신들의 목적을 차근차근 성취해가는 범행계획도 경찰의 평범한 탐문수사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음을 사몬지는 일찌감치 간파합니다. 물론 아내이자 비서인 후미코와 함께 부지런히 발품을 팔긴 해도 사몬지의 기본 전략은 일반인으로선 떠올리기 어려운 ‘몇 수를 내다보는 천재의 지략’, 즉 천재는 단서와 물증이 아니라 머리싸움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천재들의 황당하고 비약적인 두뇌싸움’을 그렸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개인적으론 천재 탐정 캐릭터를 좋아하지 않는데, 사몬지는 스스로를 천재로 포장하지도, 대놓고 자랑질을 일삼지도 않는 소박한 인물이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특이한 트릭과 다채로운 미스터리에 익숙해진 요즘 독자에겐 다소 쉽고 밍밍하게 읽힐 수도 있겠지만, ‘화려한 유괴’는 “클래식이란 이런 것!”임을 간결한 문장과 빠른 전개를 통해 매력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특히 ‘전 국민 납치’라는 설정은 얼마든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어지간한 연쇄살인보다 훨씬 더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강했는데, 1970년대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당시 독자들에게 꽤 큰 충격을 줬을 게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요즘 일본에서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가 유행 중인데, 읽은 건 몇 작품 안 되지만 왠지 그쪽으론 통 정이 가질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별한 간식이 생각날 때면 고전미 넘치는 오래된 작품들이 더 간절해지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니시무라 교타로의 작품들이 좀더 한국에 많이 소개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