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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독스
나가우라 교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2월
평점 :
1996년 농림수산성 관료 고바 게이타는 상부의 지시로 불법적인 비자금 조성에 가담했다가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 모든 걸 잃고 증권맨으로 새 인생을 사는 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의뢰를 받습니다. 홍콩의 한 은행금고에 보관돼있는 플로피 디스켓과 서류들을 탈취해달라는 것입니다.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자료가 금고 밖으로 나오는 기회를 노리라는 것입니다.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에겐 터무니없는 제안이지만 그는 수락 아니면 죽음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카드를 내밉니다. 그리고 홍콩에 도착한 고바 게이타는 자신과 닮은 다국적 패배자들과 함께 한 팀이 되어 무모한 미션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의 제목이자 주인공들인 ‘언더독스’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홀로는 이길 수 없었던 패배자들이 모인 오합지졸”, “성공한 놈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놈은 한 명도 없다. 스스로의 실패와 능력 부족으로 궁지에 몰린, 글자 그대로 패배자 팀.”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 고바 게이타를 비롯하여 정부기관 소속 홍콩인, 실직한 영국 은행원, 핀란드 출신 전직 IT 전문가 등 언더독스의 멤버들은 하나같이 지독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 뒤 세상의 궁지에 몰린 인물들입니다. 누가 봐도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빼내는 미션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니 애초 그들을 한 팀으로 묶은 이탈리아 대부호 마시모 조르지아니의 의도 자체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바 게이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든 건 홍콩에 도착하자마자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작전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도 두려운 일인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 러시아, 영국, 미국의 정부기관들이 압박과 협박을 가해오기 시작하고, 예기치 못한 습격을 받아 팀원 중 일부가 살해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고바 게이타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야말로 총 한 번 쏴본 적 없는 언더독스에겐 지옥과도 같은 악몽이 쉴 새 없이 닥쳐오는 형국입니다.
외부의 압박과 협박만큼이나 고바 게이타를 초긴장상태로 몰아넣은 건 언더독스 멤버들조차 절대 믿어선 안 된다는 의심이 피어오른 점입니다. 은행금고 속 기밀자료를 독점하려는 각국의 정부기관은 언더독스 내에 스파이를 심기에 이르렀고 실제로 배신행위가 드러나면서 고바 게이타로서는 외국 정부기관 및 내부의 배신자와의 싸움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미션에 실패해도 죽음, 미션을 포기해도 죽음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고바 게이타는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방을 요령껏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실패와 패배로 인해 궁지에 몰렸거나 복수심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첩보나 액션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언더독스가 ‘탐 크루즈 급’ 미션에 투입된다는 설정은 요약된 줄거리만 보면 다소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약한 자이기에 오히려 죽기 살기로 지혜를 짜내고 때로는 엄청난 힘을 보여주지.” 등 여러 번에 걸쳐 조르지아니의 입을 빌려 이 기이한 미션을 설득력 있게 포장합니다. 또 홍콩 도착과 함께 연일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미션 자체보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고바 게이타의 고난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독자의 눈에 ‘전직 관료이자 평범한 증권맨’의 이미지 대신 ‘조금씩 단련되는 강철’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역시 초반의 위화감을 금세 잊게 만든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중국으로의 반환을 코앞에 둔 홍콩을 무대로 피와 살이 난무하고 끝없는 배신이 이어지는 리얼한 첩보액션은 엔터테인먼트 스릴러의 미덕을 골고루 발휘하고 있습니다. 500여 페이지의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흥미진진한 전개와 다국적 캐릭터들의 카리스마도 무척 매력적입니다. 다만, 몇몇 대목에서 역시나 어쩔 수 없는 ‘아마추어’의 위화감을 완전히 지워내진 못한 점이 아쉬웠고, 일부 인물이 작위적으로 ‘배신을 위한 배신’에 이용된 점이나 주인공 고바 게이타가 막판에 보인 다소 이해하기 힘든 행동 역시 무리수로 보인 게 사실입니다. 만점도 충분한 작품이지만 고민 끝에 별 0.5개를 뺀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나가우라 교는 2021년 ‘머더스’를 통해 처음 만났는데, 더 이상 신선하지 않은 사적 복수를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캐릭터와 설정 때문에 눈길을 끌었던 작가입니다. 아이디어, 자료조사, 리얼한 첩보액션 서사가 잘 조합된 ‘언더독스’는 그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여준 작품인데, 앞으로 그의 신간 소식을 좀더 자주 들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