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쁜 토끼 ㅣ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2년 2월
평점 :
거처가 확인된 가출소녀 미치루를 집으로 데리고 와달라는 간단한 의뢰를 받고 현장으로 간 프리랜서 탐정 하무라 아키라는 예기치 못한 사태에 휘말려 옆구리에 칼을 맞고 발등뼈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습니다. 가까스로 부상에서 회복될 무렵, 이번에는 미치루의 친구 미와의 아버지로부터 열흘 넘게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미와의 행적을 쫓던 하무라는 미치루의 친구 중 또 한 명의 소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 와중에 그녀들과 친구이던 한 소녀가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초긴장 상태가 됩니다. 경찰은 살인과 실종사건을 별개라고 결론짓지만 하무라의 촉은 두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있다고 확신합니다. 하무라는 피해자 소녀들의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지만 매번 막다른 벽에 부딪히곤 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기준으로) 1996년 첫 편 ‘네 탓이야’, 2000년 ‘의뢰인은 죽었다’, 2001년 ‘나쁜 토끼’가 차례로 출간됐는데, 이후 13년이 지난 2014년에야 후속작인 ‘이별의 수법’이 출간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문승준은 앞의 세 작품을 시즌1, ‘이별의 수법’부터를 시즌2라고 명명한 바 있습니다. (2014년에 나온 단편집 ‘어두운 범람’ 중 두 편에도 하무라가 등장하긴 합니다.)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으로 40대의 하무라 아키라를 처음 만났는데, ‘사십견과 노안에 시달리는 아줌마’ 하무라가 넓디넓은 오지랖과 거침없는 폭주를 앞세워 맹활약하는 이야기에 홀딱 반해 단번에 그녀의 팬이 됐습니다. 그래서 시리즈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던 ‘나쁜 토끼’의 출간 소식은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별의 수법’보다 13년 전인 31살의 하무라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오지랖도 넓고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며 ‘세상에서 가장 불운한 탐정’이라는 별명답게 몸과 마음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맞닥뜨린 사상 최악의 9일간의 이야기를 담은 ‘나쁜 토끼’는 10대 소녀들의 실종과 피살이라는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막판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엽기를 넘어 소시오패스의 끝판왕처럼 보일 정도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소녀들의 사건 외에도 하무라를 고달프게 만드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폭행과 강간을 일삼다가 하무라에게 뜨거운 맛을 본 탐정회사 직원과 그를 손자로 둔 악귀와도 같은 할머니의 공공연한 복수 선언은 하무라로 하여금 24시간 경계태세를 풀지 못하게 만듭니다. 또 절친인 미노리를 가슴을 설레게 만든 남자에게서 수상쩍은 기운을 느끼고 조심하란 조언을 건네지만 오히려 미노리에게 온갖 비난과 분노를 산 하무라는 그저 황망할 따름입니다. 하무라에게 늘 한 발 이상 뒤처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압박을 가하곤 하는 무사시히가시 경찰서의 형사들 역시 스트레스만 겹겹이 쌓아놓는 존재들입니다.
하루가 48시간이라도 모자랄 정도로 하무라의 행보는 쉴 틈 없이 이어집니다. 실종 혹은 살해된 소녀들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집요한 탐문 외엔 딱히 단서를 얻을 길이 없기 때문인데, 그런 탓에 이야기는 다소 느리고 디테일하게 전개됩니다. 물론 칼에 찔리고, 뼈가 부러지고, 등짝이 온통 멍으로 도배되는 등 하무라의 악전고투는 안쓰러움과 함께 흥미진진하게 읽히지만, 상대적으로 탐문과 추리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맴맴 도는 형국이다 보니 하무라의 찐팬이 아니라면 중반부쯤 지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서브 사건들이 중간중간 의외의 상황들을 통해 지루함을 덜어주고 있고, 노골적으로 묘사되진 않아도 연애와는 담을 쌓은 하무라가 살짝 로맨스의 기운을 내보이는 대목도 막간극과 같은 재미를 주고 있어서 5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금세 독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가 더 많아서 어떤 작품이 가장 재미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으론 ‘이별의 수법’을 통해 40대의 하무라를 먼저 만났던 게 더 괜찮았다는 생각입니다. 31살의 하무라가 맹활약한 ‘나쁜 토끼’도 재미있긴 했지만, 캐릭터의 매력과 카리스마는 ‘이별의 수법’이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고백하자면, 와카타케 나나미의 미스터리 서사가 개인적인 취향에 아주 잘 맞는 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토끼’를 허겁지겁 찾아 읽은 건 순전히 주인공 하무라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 때문입니다. 간혹 작가와는 잘 안 맞아도 주인공 때문에 작품을 선택할 때가 있는데,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는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토끼’보다 먼저 출간된 ‘네 탓이야’와 ‘의뢰인은 죽었다’는 잘 벼려진 칼날 같은 20대의 하무라가 등장합니다. ‘나쁜 토끼’보다 더 초기작이라 이야기는 기대에 못 미칠지 몰라도 좀더 날것 같은 하무라를 만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기대감이 드는 작품들입니다. 모두 절판된 상태지만 중고로라도 구해서 하무라의 매력을 한껏 맛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