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의 남편 이판사판
하라다 마하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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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 스타일이 아니라면 정치를 소재로 한 모든 콘텐츠는 사실상 판타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악관 내 권력투쟁을 다룬 여러 편의 미드도, 기무라 타쿠야를 최연소 총리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던 일드 체인지도 실은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를 구현시켜준 작품들입니다. ‘총리의 남편에선 사상 최초 여성총리이자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쥔 40대 소마 린코가 바로 그 판타지의 주인공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1인칭 화자는 린코가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히요리입니다. 출판사 홍보카피에 따르면 그는 조류애호 눈물과다 초식남인데, 조류학자로서 늘 새를 관찰하며 일기를 써오던 그는 아내 린코가 총리가 된 날부터 특별한 관찰일기를 쓰기 시작합니다. 먼 미래에 누군가 읽어주기를 바라며 아내이자 총리인 린코에 관한 모든 것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거기엔 그들의 첫 만남이나 평범한 일상부터 총리와 총리의 남편으로서 겪은 희로애락이 디테일하게 담겨있습니다.

이야기는 린코가 총리로서 맞이한 첫날부터 시작되어 숱한 우여곡절과 치명적인 위기를 넘기며 국민들에게 신임 받는 유능한 총리로 자리 잡기까지의 시간들을 그립니다. 린코가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의 공격이라든가 당장 국민들로부터 지지받기 어려운, 하지만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위기를 겪는다면, 히요리는 예의 허당에 가까운 성격 때문에 이른바 권력자 가족의 스캔들을 자초하거나 린코에게 큰 힘이 돼주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 때문에 고뇌에 빠지곤 합니다.

 

사실, 린코와 히요리에게 닥치는 위기는 딱히 새롭다거나 특별하진 않습니다. 위기 자체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식도 충분히 예측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여전히 독자에게 불쑥불쑥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저급하고 탐욕스런 정치인들의 행태 때문일 것입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시대를 불문하고 사리사욕에 눈 먼 권력자들을 응징하는 선한 리더의 이야기는 늘 통쾌한 대리만족과 감동을 주기 마련입니다. 린코는 그런 서사에 잘 어울리는 주인공이고, 히요리는 눈물과다 초식남이긴 해도 늘 린코에게 역시 나는 히요리 씨의 이런 점이 좋다니까.”라는 칭찬을 듣는 훌륭한 화자이자 조연입니다.

 

린코의 첫 번째 캐릭터는 물론 여성총리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여성성은 그리 강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장에는 욕을 먹고 표를 잃고 정치적인 위기를 자초할 게 뻔한 정책이더라도 미래를 위해 진심으로 호소하고 제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가 훨씬 더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겉으론 사람 좋은 아저씨 같아도 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노회한 정치인이라든가 어려운 시절부터 오랫동안 함께 동고동락해온 충직한 비서진들, 여성총리에 관한 대중적 관심을 이용하는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 이 작품의 중요한 조연들 역시 린코의 여성성보다는 바람직한 정치인캐릭터를 강조하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린코의 1인칭 시점도, 3인칭 시점도 아닌 허당 남편이자 조류학자 히요리의 관점에서 전개된 덕분에 딱딱한 정치 서사와는 거리가 먼 흥미진진한 총리 관찰기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지긴 했어도 독특한 개성을 지닐 수 있었던 건 바로 타이틀 롤을 맡은 총리의 남편히요리 덕분이란 생각입니다. 야심가나 빈틈없는 조력자가 아니라 오로지 새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눈물 많은 남자를 화자이자 총리의 남편으로 설정한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미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출간된 건 2013년인데, 공교롭게도 린코가 내건 공약들은 2022년 대한민국 대선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문제는 공약 따위야 누구나 내걸 수 있는 것이지만 그걸 제대로 실천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린코의 행보는 한국이든 일본이든 많은 독자에게 우리에게도 저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판타지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 대선을 1주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 판타지는 훨씬 더 강렬하고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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