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흑백합
타지마 토시유키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52년 여름, 14살의 스스무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 아사기의 롯코 산 별장에서 방학을 보내게 됩니다. 아사기의 아들인 동갑내기 가즈히코와 산 곳곳을 누비던 스스무는 대저택에 사는 동갑내기 소녀 카오루와 어울리게 되고 세 사람은 잊지 못할 여름방학을 만끽합니다. 한편,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와 별개로 어른들의 비밀스런 과거사가 전개되는데, 하나는 1935년 두 소년의 아버지가 베를린 출장 때 만난 마치코라는 미지의 여성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41~1945년에 걸친 카오루의 고모 히토미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소년소녀들은 우연히 혹은 호기심에 사로잡혀 서서히 어른들의 비극 한복판으로 다가갑니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갈 무렵 롯코 산엔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집니다.
278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에 ‘독이 서린 어른들의 비밀’이라는 미스터리를 담고 있긴 해도 ‘14살 소년소녀들의 풋사랑’이 혼재된 이야기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작품입니다. “순수문학과 추리문학이 절묘하게 만난 작품”이라는 홍보카피 좀 별난 간식 정도로 이 작품을 대하게 만들었는데, 고백하자면 마지막 장을 덮고 서평을 쓰기까지 대혼란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곱씹어볼수록 머릿속이 어질어질해지면서 앞서 읽은 문장과 단어들이 만화경 속 색종이 조각들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듯한 야릇한 불쾌감마저 느꼈는데, 가장 큰 이유는 막판에 밝혀진 트릭과 반전의 충격 때문입니다. 쉽고 가벼운 문장들이라 안이하고 빠르게 읽어버린 것도, 초반부터 그릴까 말까 고민했던 인물관계도를 그리지 않은 일도 후회됐습니다. 그랬다면 막판에 밝혀진 사실들이 조금은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소년소녀들의 풋풋한 첫사랑은 롯코 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그 또래다운 순수함을 발산하며 그려집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른들의 챕터 역시 팽팽한 긴장감보다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라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정도에 그칩니다. 물론 1945년 패전을 앞두고 일어난 살인사건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긴 하지만 그 사건이 1952년의 소년소녀들과 어떻게 연결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어 그다지 큰 미끼로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첫사랑에 달떠있던 소년소녀들은 방학이 끝나갈 무렵 어른들에게서 하나둘 이상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대놓고 불륜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밀회를 즐기는 자들, 문신투성이 야쿠자들과 은밀한 만남을 갖는 어른, 누군가를 닮은 오래된 앨범 속 사진의 인물, ‘여왕’이라 불리며 찻집을 운영하는 비밀투성이 여자 등 소년소녀들에게는 하나같이 두려움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물들입니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소년소녀들의 눈을 통해 어른들의 비밀을 들여다보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론 그들은 알아챌 수 없는 비밀을 독자에게만 알려주기도 합니다. 특히 막판에 한 소년이 목격한 사소한 사고 장면은 독자만이 눈치 챌 수 있는, 1935년부터 시작된 비극의 전모와 두 개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알려주는 결정적 단서이자 반전의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독자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허겁지겁 책의 앞머리로 돌아가 무심코 읽어 넘겼던 문장들과 평범하게만 보였던 단어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문장과 단어들이 실은 복선으로 가득 찬 트릭 덩어리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인터넷서점과 미스터리 카페를 뒤져보니 역시 이 작품의 막판 반전은 많은 독자들의 논란거리였습니다. “뭐가 반전이란 거냐?”, “내가 생각하는 게 맞긴 맞는 거냐?”, “이 사람이 살인범이라고? 헐~!!!” 등 의문, 분노, 배신감, 감탄 등 다양한 반응들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작가가 놀랍기 그지없는 반전을 마치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하게, 잠시 멍 때리다간 눈치 채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독자 앞에 풀어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치 맑은 물에 떨어진 먹물 한 방울처럼 서서히 독자의 머릿속에 그 충격이 퍼지도록 설계라도 한 듯 말입니다. 두 번은 읽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미스터리를 숱하게 만났지만 실제로 두 번을 읽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흑백합’은 두 번, 그것도 연달아 읽어야만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전개와 구성은 다소 극단적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호불호를 일으켰는데, 제 경우엔 어질어질한 가운데에도 별 5개 이상을 주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이야기 속의 미스터리도 흥미로웠지만 “소설 자체가 미스터리!”라는 어느 독자의 평처럼 단어 하나하나까지 해부해보고 싶을 만큼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놓고 독서모임을 갖는다면 다 읽고도 미처 눈치 못 챘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소년소녀들의 풋사랑과 쉽고 간결한 문장들이 얼마나 대단한 위장막 역할을 했는지도 함께 말입니다.
서평을 마치는 대로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다시 읽을 생각인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서평 자체를 다시 써야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이야기 자체보다도 두 번 읽지 않곤 못 배기게 만든 작가의 대단한 설계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