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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의 인연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월
평점 :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부모를 잃은 양식당 ‘아리아케’의 3남매. 아동보호시설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했지만 세상은 그들에게 더 큰 시련을 안깁니다. 번번이 누군가에게 속아 금전적 손실은 물론 마음의 상처까지 입은 그들은 더 이상 속는 쪽이 아니라 속이는 쪽이 되기 위해 지능적인 사기 계획을 꾸미기로 결심합니다. 막내 여동생 시즈나의 미모를 무기 삼아 성공적인 사기 행각을 이어가던 어느 날, 남매는 우연히 14년 전 부모를 살해한 범인과 꼭 닮은 남자를 목격합니다. 더구나 그가 운영하는 유명 양식당의 대표 메뉴의 맛은 살해된 아버지가 각고의 노력 끝에 개발했던 비밀 레시피의 맛과 너무도 흡사합니다. 남매는 그가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확신하고 복수를 계획합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책장에 꽂아놓고 한참을 방치한 유일한 이유는 순전히 제목과 표지 때문입니다. 책읽기의 대부분을 미스터리와 스릴러 위주로 삼는데다 간식처럼 읽는 순문학조차 조금은 별난(?) 이야기에 치중하다 보니 제목도 표지도 애절한 로맨스의 향기를 폴폴 풍기는 ‘유성의 인연’은 자꾸만 뒤로 밀려온 것입니다. 더구나 읽기 전에 그 어떤 정보도 접하지 않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탓에 이야기가 시작되자마자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대목에서 적잖이 놀란 게 사실입니다.
매번 자신들을 속이고 상처만 남긴 세상을 향해 사기라는 방법으로 복수를 시작한 아리아케 3남매 – 고이치, 다이스케, 시즈나 – 가 14년 만에 우연히 부모 살해범을 목격하지만, 희미한 목격담 외엔 달리 그를 경찰에 넘길 단서나 증거가 없는데다 공소시효 만료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이란 걸 깨닫곤 결국 경찰이 그 범인을 쫓게 만들기 위해 고도의 덫을 마련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큰 줄기입니다.
다소 신파의 냄새가 나는 설정인데다 직접적인 복수보다 ‘덫을 놓아 경찰이 범인을 쫓게끔 만든다는 전략’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여타 살인 미스터리에 비해 긴장감이 덜한 게 사실입니다. 또 2020년 개정판 기준으로 (1,2권 합쳐) 624페이지에 달하는 적잖은 분량이지만, 이야기의 얼개만 보면 그만한 분량이 필요해 보이진 않아서 왠지 장기 연재물 같은 느낌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이야기꾼인 작가는 크고 작은 설정들을 통해 잠시도 지루하거나 느슨함을 느끼지 못하게끔 촘촘한 서사를 구축했습니다.
맏이인 고이치가 사기극을 설계하고 의태(擬態)의 천재인 둘째 다이스케와 매력적인 막내 시즈나가 실행에 옮기는 사기극도 흥미진진하고, 범인을 발견한 뒤 경찰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정교한 덫을 설치하는 대목도 몇 수 앞을 내다보는 장기판 고수의 전략처럼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특히 범인을 옭아매기 위해 최전방에 투입된 막내 시즈나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며 작전을 위태롭게 만드는 대목에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미스터리에 깃든 애틋함과 휴머니즘’을 만끽할 수 있어서 그의 팬들에겐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장면들입니다.
막판 반전이 확실해 보인 탓에 독자는 3남매가 지목한 범인 외에 또 다른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책장을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진범 후보로 여길 만한 인물이 별로 없어서 오히려 더 긴장하게 되고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애초 지목된 자가 진짜 범인이 아닐까, 싶기도 할 정도로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진범으로 점찍은 인물이 있었는데, 예상대로 틀리긴 했지만 그 인물이 범인이었다고 해도 반전의 맛은 여전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누가 범인?’보다는 ‘사연’ 자체가 더 중요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막판에 드러난 진실을 놓고 독자에 따라 “쉽고 밍밍한 미스터리”로 폄하할 수도 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맛볼 수 있었던 애틋하고 서글픈 서사를 곁들임으로써 조금은 아쉬워보였던 미스터리를 모자라지 않게 보완해줍니다. 또 쉽고 평이한 문장들 때문에 다소 가볍게 읽히는 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특징 중 하나지만,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유성의 인연’ 역시 죄다 뜯어놓고 분석해보면 소품 하나, 단어 하나, 감정 하나까지 무척 정교하고 치밀하게 배치된, 그래서 그의 저력이 여실히 배어있는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살해당하고 세상에 내동댕이쳐진 3남매의 비극이 그려진 초반만 해도 왠지 ‘백야행’을 닮은 작품이 아닐까,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은 건 무척 아쉬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의 인연’은 “딱 히가시노 게이고답다!”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