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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달을 먹다’는 2007년 ‘제13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입니다. 출간 즈음에 읽었으니 대략 14년 만에 다시 만난 셈인데, 최근 오랫동안 책장에 방치돼있던 책들을 골라내다가 유독 ‘달을 먹다’에 시선이 머문 건 당시 꽤 파격적이란 느낌과 함께 깊은 여운을 만끽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부분적인 기억만 남은 것도 호기심을 자극한 이유 중 하나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달을 먹다’는 캐릭터, 이야기, 시대적 배경, 그리고 간결하고 단정한 문장 속에 깃든 서늘함과 애틋함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주목받았어야 할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정조와 순조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고 있으니 역사소설인 건 분명하지만, 실은 이 작품에서 역사는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의 순도와 위기감을 고조시킬 뿐 그 자체로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네 가문의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무대를 현대로 바꿔도 무방할 만큼 보편적인 인물과 감정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소설이라는 외피는 독자로 하여금 똑같은 ‘금지된 사랑’이라 하더라도 “엄격한 법도와 완강한 신분질서가 작동하던 그 시절”이라서 더욱 불온하고 위험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도록 설치된 일종의 보조장치라고 할까요?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능하거나 비겁하거나 가부장적인 권위만 앞세우는 남자들의 권세와 허영 속에서 맥없이 시들거나 분노만 삼킬 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굳은 심지로 자신의 입지를 지키는 여러 여성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호색한에 난봉꾼이던 아버지를 증오한 나머지 시집간 뒤에도 반골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묘연, 서녀로 태어났음에도 양반처럼 애지중지 키워졌지만 결국 중인의 첩으로 들어가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하연, 첫 아이를 유산한 뒤 피폐한 삶을 살다가 가까스로 딸을 낳았지만 아무런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점차 나락으로 떨어지는 후인, 어머니가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 뒤 무책임한 부성의 굴레에 갇혀 살다가 끝내 파국을 맞이하고 마는 향이 등이 그녀들입니다.
또 하나는 지독히도 비극적인 여러 커플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다리를 저는 12살 소녀에게 반했지만 어머니의 반대로 다른 여자와 결혼한 뒤 폐인에 이르고 만 여문, 학대에 가까운 남편의 태도에 지쳐 모든 것을 놓고 싶어 하는 15살 연상의 여자를 흠모한 나머지 그녀를 훔쳐 달아나는 후평, 그리고 이 작품에서 가장 두꺼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신분이 다른 이종사촌 간의 금지된 사랑’이 그것입니다. 이른바 막장에 가까운 설정이지만 작가 특유의 담담하고 서정성 높은 문장과 역사소설이라는 외피 덕분에 오히려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돋보인 이야기입니다.
사실 ‘달을 먹다’는 독자에게 결코 친절한 작품이 아닙니다. 간결하고 단정하지만 서늘함과 애틋함이 깃든 문장들은 베껴 쓰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이지만, 화자는 10명 가까이나 되고, 또 그들이 특별한 경계(줄바꿈이나 챕터 바꾸기)도 없이 시공간을 수시로 바꿔가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구성은 꽤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심사평 중에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놓고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라든가 “3대에 걸친 욕망과 사랑의 퍼즐 맞추기”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페이지는 느리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지금 읽고 있는 대목이 앞의 어느 부분과 연결된 이야기인지를 세세히 살피며 읽어야만 합니다. 독서 스타일이 안 맞는 독자라면 다소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구성이지만, 반대로 이 작품만의 독특함이자 매력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달을 먹다’에 홀딱 반한 나머지 김진규의 다음 작품인 ‘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2009년)까지 내쳐 읽었다가 (재미있긴 했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조금은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달을 먹다’의 서평을 쓰기 위해 인터넷서점을 방문했다가 알게 된 더 안타까운 사실은 그 이후 출간된 ‘저승차사 화율의 마지막 선택’(2010년)을 끝으로 김진규의 작품이 더는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감정을 후벼 파면서도 절대 오버하지 않는 문장들, 영국식 블랙유머를 연상시키는 촌철살인 같은 독설, 침향과 꽃차와 자수(刺繡) 등 온갖 시각적인 즐거움을 안겨주는 매력적인 묘사에 이르기까지 개인적인 취향을 넘어 장점과 미덕이 많은 작가로 여겼기에 10년 넘게 무소식인 김진규의 새 이야기가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절필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새 작품으로 독자들과 꼭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