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1
토머스 해리스 지음, 이창식 옮김 / 창해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7년 전 양들의 침묵에서 FBI 연수생이었던 클라리스 스탈링은 그사이 유능한 특별수사관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훼방하고 질투하는 자들의 모함과 그녀 자신의 고집 센 태도 때문에 FBI에서의 앞날은 오히려 꽉 막힌 상태입니다. 마약밀매단 급습 중 부적절한 용의자 사살문제가 불거지면서 스탈링은 큰 위기를 맞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보도된 덕분에 7년 만에 한니발 렉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됩니다. 한편, 과거 렉터에게 공격을 당해 만신창이가 된 채 첨단 의료시설에 의존하고 있는 메이슨 버저는 엄청난 유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여 렉터에 대한 정보를 끌어 모읍니다. 이탈리아에서 렉터의 흔적을 보고받은 그는 자신이 당한 것 이상의 참혹한 방법으로 렉터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웁니다.

 

레드 드래건양들의 침묵에 이은 한니발 렉터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렉터는 앞선 두 작품에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카메오로 보는 게 적절할 정도로 사건 자체와는 거리가 있던 인물입니다. ‘레드 드래건에서는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만 드러냈을 뿐 특별한 역할이 없었고, ‘양들의 침묵에서는 스탈링과의 만남을 통해 팽팽한 심리전을 벌이며 비교적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긴 했지만 어쨌든 연쇄살인범은 따로 존재했기에 (책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세 번째 주인공 정도로 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렉터가 자신의 이름을 딴 한니발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왔으니 이번 작품은 스탈링과 함께 메인 주인공으로 맹활약할 렉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니발을 이끄는 주요 인물은 모두 네 명입니다. 7년 만에 렉터의 추적을 재개한 스탈링은 끈질긴 조사를 펼치면서도 오래 전 그와 나눴던 대화들과 그가 종적을 감추면서 남긴 위로와 격려의 편지를 떠올리며 묘한 감회에 사로잡힙니다. 이탈리아에서 펠 박사라는 신분으로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던 렉터는 자신에게 사적인 복수를 가하려는 메이슨의 계획을 감지한 뒤 오랜만에 피비린내를 진동할 태세를 갖춥니다. 메이슨은 렉터를 납치한 뒤 산 채로 갈가리 찢어 죽이기 위해 돈과 권력을 있는대로 휘두르는 사이코패스입니다. 또 그에게 돈으로 매수된 법무부 관료 폴 렌들러는 양들의 침묵에서 이미 스탈링과 악연을 맺었던 인물로 이번에도 스탈링과 렉터를 파멸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악당으로 등장합니다.

 

주요 인물들의 설정을 보면 스탈링과 렉터의 맞대결이라기보다는 메이슨의 복수극으로 인해 위기에 빠진 렉터를 스탈링이 구하는 이야기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FBI 요원 스탈링과 식인 살인마 렉터는 적대적 관계일 뿐 아니라 서로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며 묘하게 교감하는 관계라서 이른바 공동의 적인 메이슨 & 렌들러를 향해 협력할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건 1/3 지점 정도까지 누구나 할 수 있는 예상이고 추측일 뿐 이야기가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앞선 두 작품이 분명 연쇄살인마 스릴러이긴 해도 심리전의 성격이 강했다면 한니발은 사건성이 명확한 작품입니다. 심리전과는 확연히 다른 현실적인 긴장감이 팽팽하고, 과거가 아닌 현재 시점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줄줄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많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는 전작들에 비해 거의 2배속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한니발의 미덕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스포일러를 피해 아쉬움을 느낀 대목을 정리하면, 우선 황당한 느낌까지 받은 막판 엔딩입니다. 많은 독자들이 원했을 수도, 반대로 그만큼 많은 독자가 절대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는 엔딩인데, 개인적으론 알고 보니 모두 꿈이었다.”에 버금갈 만큼 납득하기 힘든 대단원에 솔직히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갑자기 유년기의 트라우마를 꺼내든 렉터의 뜬금없는 캐릭터입니다. 2차 대전 말기 여동생 미샤를 비참하게 잃은 렉터의 상처가 마치 그의 핵심 캐릭터인 양 그려진 것도, 또 그 상처를 스탈링에게 투사하는 설정도 모두 개연성 부족한 억지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으로 허술하게 묘사된 클라이맥스(렉터를 향한 메이슨의 복수)의 문제인데, 어설픈 액션과 함께 뭐가 이렇게 쉬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전작들 모두 비슷한 허술함을 지닌 걸 떠올려보면 작가의 고유한 성향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략 절반 정도까지는 스릴러와 심리전의 미덕을 고루 갖춰서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 이후로는 계속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돼서 오히려 몰입감이 훅 떨어졌습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180도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애초 왜 이 작품이 양들의 침묵이후 11년 만에 출간됐을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저로서는, 무리한 추측이긴 해도, 전작들의 영광에 편승한 작가의 사심(?)이 발동했거나 주변에서 등을 떠민 탓에 마지못해 후속작을 내게 된 작가의 어정쩡함이 빚어낸 산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렉터의 프리퀄을 다룬 한니발 라이징까지 읽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아무래도 한니발보다 더한 작가의 사심과 어정쩡함을 마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또 지금까지 읽어온 렉터와는 전혀 달라 보이는 과거의 렉터를 읽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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