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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소녀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7월
평점 :
15년차 신부인 재클린 브룩스(이하 잭)는 노팅엄의 담당 교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린 탓에 징계성 발령을 받곤 15살 딸 플로와 함께 채플 크로프트라는 작은 마을로 이사합니다. 교회와 사택은 모두 심하게 낡았고 마을 사람들은 ‘여성 신부’라는 낯선 존재에 호기심과 경계심을 함께 드러냅니다. 하지만 잭과 플로 모녀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이사 첫날부터 연이어 들이닥친 기묘한 사건들입니다. 온몸이 피범벅이 된 소녀가 나타나고, 500년 전 화형당한 어린 소녀들을 본 따 만든 나무인형이 교회 앞에 놓여있는가 하면 익명의 인물이 보낸 피 묻은 구마(驅魔)의식 세트에는 잭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있습니다. 더구나 30년 전 이 마을에서 두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과 전임 신부가 자살했다는 것까지 알게 되자 잭은 혼란을 넘어 두려움까지 느끼게 됩니다.
C. J. 튜더는 ‘영국의 여자 스티븐 킹’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로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가입니다. 스티븐 킹이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분명 C. J. 튜더의 글도 좋아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하니 그녀의 스타일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소녀들’은 그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복잡하기 그지없는 사건들을 찬찬히 풀어가는 현실적인 미스터리와 명백히 호러의 영역에 속하는 소재들을 매끄럽게 결합시킨 작품입니다.
잭의 새 둥지인 채플 크로프트는 작은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현재에 걸쳐 끔찍한 사건들을 겪었습니다. 500년 전인 16세기 중반엔 신교도 박해로 인해 두 명의 어린 소녀를 포함 여덟 명의 순교자가 화형을 당한 바 있고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또 30년 전엔 두 명의 15살 소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으며, 두 달 전 자살한 전임 신부의 죽음은 몇몇 사람에 의해 ‘타살’ 가능성이 제기되는 중입니다.
이렇듯 불온한 분위기로 가득 찬 채플 크로프트에서 잭과 플로는 평생 잊지 못할 며칠을 보내게 됩니다. 잭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전임 신부의 자살에 의문을 품고 나름 조사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마을과 교회를 지배하는 하퍼 가문과 끊임없는 충돌을 겪습니다. 또 교회 지하실에서 발견된 의문의 유골들 때문에 30년 전 두 소녀의 실종사건에도 휘말리는데, 그런 와중에 딸 플로는 묘지에서 500년 전 화형당한 소녀들의 유령을 봤다며 잭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근육긴장이상증을 겪는 수상쩍은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크고 작은 충돌을 유발합니다.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잭은 과거 자신과 끔찍한 악연을 맺었던 남자가 14년 만에 교도소에서 조기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곤 겁에 질리는데, 그야말로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제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운 지경에 처한 셈입니다.
이 작품의 특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는 ‘종교’와 ‘작은 마을’입니다. 동기도 방법도 제각각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비극은 종교적 요소들에 의해 잉태됐고, 작은 마을의 폐쇄성은 그 비극들을 더 끔찍하게 만들거나 완벽하게 은폐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을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탐욕, 욕망, 이기심들이 가세하면서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를 마을 전체에 진동하게 만든 것입니다. 채플 크로프트에서 벌어진 사건들이 소시오패스 연쇄살인마의 잔혹한 범행보다 더 짙고 무거운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아마도 이런 조합들의 위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꽤 많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다지 어렵게 읽히는 작품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읽은 C. J. 튜더의 작품들(‘초크맨’, ‘디 아더 피플’)이 대체로 그런 스타일이었는데 독자로서 거기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작가가 워낙 이야기를 매끄럽게 잘 풀어낸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스티븐 킹을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이 잘 살아있는 작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다만, C. J. 튜더의 호러는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기보다는 카메오처럼 짧고 굵게 활용되는 방식이라 스티븐 킹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긴 합니다.)
막판 반전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설정이라 마지막 페이지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었는데, 앞서 뿌려놓은 숱한 단서들을 완벽하게 회수하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제대로 친 흥미진진한 대목이었습니다.
2018년 ‘초크맨’ 이후 1년에 한 편씩 꼬박꼬박 신작을 내온 C. J. 튜더는 후기를 통해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날까요?”라는 인사를 남겼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무슨 이야기를 내놓을지 사뭇 기대가 됩니다. 그 전에 아직 유일하게 읽지 못한 ‘애니가 돌아왔다’를 먼저 읽어야 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