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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잇폰기 도루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21년 6월
평점 :
(작가와 동명인 주인공) 잇폰기 도루는 종이신문의 몰락이라는 시대의 변화를 몸소 겪고 있는 46살의 베테랑 사회부 기자입니다. 어느 날 수도권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을 자처하는 자가 편지를 보내와 “또 다른 살인을 막고 싶다면 나와의 설전에서 이겨라!”라는 메시지와 함께 잇폰기 도루와의 지면을 통한 대결을 제안합니다. 이후 잇폰기 도루와 범인의 편지가 1면에 게재되기 시작하자 판매부수와 광고가 급증하며 사세가 기울던 신문사의 경영난은 눈에 띄게 개선됩니다. 하지만 잇폰기 도루의 관심은 어떻게든 추가범행을 저지하고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 있습니다. 경찰 못잖은 그의 집요한 조사와 고민은 결국 진실을 파헤치는 데 성공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한없는 스산함과 회한만 남고 맙니다.
개인적으로 기자가 등장하는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합니다. 장르를 불문하고 최고작으로 꼽는 ‘클라이머즈 하이’(요코야마 히데오)를 비롯 ‘미드나잇 저널’(혼조 마사토), ‘시인’(마이클 코넬리) 등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그 나름의 특별한 맛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지금까지 읽은 기자 미스터리 가운데 언론의 속살을 가장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취재, 회의, 편집, 인쇄 등 신문 제작의 전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진 것은 물론 특종과 인정(人情) 사이의 고뇌라든가 저널리즘과 커머셜리즘(상업주의)의 갈등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지만 연쇄살인 미스터리, 신문산업의 위기, 기자의 사명과 책임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빈틈없이 알맹이가 꽉 찬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연쇄살인범이 베테랑 사회부 기자 잇폰기 도루를 콕 찝어 설전을 제안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자칭 ‘백신’이라는 연쇄살인범은 “인간은 추잡한 성 관계를 통해 재생산된 바이러스이므로 죽여 마땅하다.”는 꽤나 거창하면서도 어딘가 허황된 철학을 내세우며 잇폰기 도루를 도발합니다. 그에 대처하는 잇폰기 도루의 반론은 대체로 정직하고 도덕적인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어쨌든 그 설전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눈길을 끈 대목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백신’과 잇폰기 도루의 설전이 시작되면서 이야기의 속도감과 긴장감이 훅 떨어졌는데, 아무래도 오고가는 메시지들이 다소 형이상학적인데다 동어반복에 가깝다 보니 초반 한두 번을 제외하곤 지루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나치게 디테일하게 그려진 신문사에 관한 묘사와 함께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인데, ‘백신’의 주장이 좀더 현실감이 있었거나 둘 사이에 주고받는 메시지의 분량이 적절히 압축됐더라면 훨씬 더 알찬 작품이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잇폰기 도루 외에 또 한 명의 주요 화자는 10대 소년인 에바라 요이치로입니다. 자신의 출생의 비밀 때문에 괴로워하는 10대 소년의 고뇌는 메인 스토리와는 전혀 별개처럼 전개되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연쇄살인범 ‘백신’과 잇폰기 도루에게 연결되는데 이 대목에서 연이어 터지는 반전은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작위적이라고 여길 수도 있는 반전들이지만 앞서 잘 깔아놓은 포석들 덕분에 크게 억지스러워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 작품은 27회 아유카와 데쓰야 우수상 수상작인데, 그때 대상을 받은 작품이 ‘시인장의 살인’(이마무라 마사히로)입니다. 본격 미스터리를 지향하는 공모라서 ‘시인장의 살인’에게 후한 점수를 준 것 같은데, 제가 심사위원이었다면 이 작품에 조금은 더 높은 점수를 줬을 것 같습니다. 소재도 성격도 전혀 다른 작품들이라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인 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는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당황스럽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과 동명인 작가 잇폰기 도루는 후속작으로 사회파 미스터리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죽일 수 없었다’ 역시 넓은 범위의 사회파 미스터리에 속하는데, 과연 잇폰기 도루가 그릴 본격적인 사회파 미스터리가 어떤 소재, 어떤 사건들을 다루게 될지 사뭇 궁금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