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행권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7-5 미치 랩 시리즈 4
빈스 플린 지음, 이훈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이번 작품에서 미치 랩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 첫째는 필리핀의 급진 이슬람단체에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충돌과 테러의 가능성을 막는 것이다. 납치된 미국인 가족을 구하려던 해군의 비밀작전이 적의 매복에 의해 실패하고 사전 정보유출 가능성까지 제기되자 대통령은 랩에게 후속 조치를 지시한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유국가의 건설이 삶의 목표인 테러리스트 데이비드는 평화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소신을 앞세우며 미국과 이스라엘과 아랍 세계를 뒤흔들어놓을 엄청난 단독 테러 계획을 세운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전편인 권력의 분립’(‘미치 랩 시리즈’ 3)에서 야비한 정치인에 의해 암살자 신분이 폭로된 랩은 사면초가에 처했습니다. 애초 은퇴와 함께 애너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 생각이던 랩은 하늘의 계시라고 여겼지만, 대통령으로부터 은퇴 대신 내근직을 권유받자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집행권초반의 랩은 실제로 내근직인 (직함은 그럴듯한) 대테러업무 특별보좌관이 돼있었고 애너와의 신혼여행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랩이 결코 책상머리에 앉아 지시나 내리는 역할에 만족하지 않을 것임을, 그래서 결국 현장으로 달려가 숱한 위기를 겪을 것임을 불 보듯 뻔히 짐작할 수 있었고 역시 랩은 필리핀, 미국, 프랑스를 오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멋지게 클리어합니다.

 

필리핀에 억류된 미국인 가족을 구출하는 작전은 꽤 긴 분량을 차지했지만 알맹이는 무척 단선적이어서 익숙한 긴장감 이상의 맛을 느낄 순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퀀스의 핵심은 구출 작전 자체보다 기밀정보를 둘러싼 백악관 주변의 정치적 갈등에 있습니다. 현장을 모르는 것까진 용서돼도 현장을 무시하고 책상머리의 권력을 더 중요시 여기며 기밀정보를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전파하는 관료들의 행태는 랩과 그의 상관인 CIA 국장 아이린 케네디를 격노하게 만듭니다. 어렵사리 인질 구출작전에 성공한 랩과 케네디가 그들을 응징하는 대목은 어지간한 액션 장면보다 10배는 더 통쾌하고 짜릿합니다.

 

미국인 가족 구출작전과는 완전히 별개로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위험한 계획이 전개됩니다. 팔레스타인 자유국가를 꿈꾸는 데이비드는 진정한 평화를 위해선 피아를 막론하고 위험요소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자입니다. 무고한 희생을 낳는 폭력을 저주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아랍의 문화를 증오하는 그는 어찌 보면 지극히 도덕적이고 선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팔레스타인의 진정한 해방과 자유국가 건설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독한 폭력입니다. 더구나 그는 어느 단체에도 속하지 않은 싱글 플레이어입니다. 그런 그가 전 세계를 요동치게 할 엄청난 테러 계획을 수립하고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끼인 미국은 상상치도 못한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여전히 짜릿한 첩보 액션스릴러의 미덕을 갖추고 있지만 집행권은 전작들에 비해선 좀 힘이 빠져 보였습니다. 랩의 활약이 교과서적인 틀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고, 테러리스트 데이비드의 비현실적인 이상주의가 큰 매력을 지니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사소할 수도 있지만 결혼 후 랩의 발목을 잡는 것 이상의 역할을 못하는 애너 릴리의 민폐 캐릭터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설정이었는데, 랩의 내면적인 갈등을 부추기는 중요한 조연이지만 철없고 무모한 것은 물론 랩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그녀의 징징거림은 더는 보고 싶지 않은 대목입니다.

작품 외적으로 아쉬운 점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불편한 번역 문장들입니다. 전작들에서도 간간이 느끼긴 했지만 집행권은 유독 심하게 보였습니다. 원작이 그런 것인지 번역 과정에서 생긴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자주 눈에 띈 오타들까지 더해져서 수시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현장을 몹시도 그리워하는 랩의 타고난 기질과 그를 안전한 가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려는 애너의 욕심, 그리고 그를 적극 활용하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답답한 CIA 국장의 고민 등 랩의 운신을 까다롭게 만드는 미묘한 갈등이 무척 첨예한데, 과연 그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행보를 걷고 어떤 충돌을 겪게 될까요? 기대감와 궁금증 때문에라도 다음 작품인 전몰자의 날을 빨리 읽어보려고 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