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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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간격으로 도쿄 시내에서 두 건의 매춘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39살 미혼인 는 두 사건의 피해자와 밀접한 관계입니다. 한 명은 어릴 적부터 괴물 같은 미모로 주위를 압도했던 친동생 유리코이고, 또 한 명은 명문 Q중고교 동창생인 가즈에입니다. 재판이 열리는 법원에서 Q중고교 동창들과 마주친 는 피해자들이 남긴 일기를 전달받곤 20년도 넘은 과거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립니다. 그리고 자신과 두 피해자를 비롯한 네 명의 여성이 어떻게 괴물로 진화됐는지를 찬찬히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이 작품은 1997년에 벌어진 도쿄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집필됐다고 합니다.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간부가 밤이면 거리에서 몸을 팔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당시 꽤 충격적인 뉴스였다고 하는데, 기리노 나쓰오는 한 여성의 극단적인 변신을 야기한 동기와 과정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픽션으로 그리기 위해 10대 시절을 기점으로 이야기를 직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 마음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라고 밝힙니다.

 

이 작품에는 네 명의 괴물이 등장합니다. 15살에 숙부와 첫 관계를 가진 유리코는 축복인지 저주일지 모를 괴물 같은 미모와 타고난 님포마니아(색정광, 비정상적 성욕항진증)로 인해 평생 수많은 남자에게 몸을 팔아왔고, 그녀의 친언니인 동생과는 비교도 안 되는 못 생긴 추녀라는 낙인을 오로지 악의라는 방패로 막아내며 평생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슴도치처럼 살아왔습니다. 또 물려받은 것도 타고난 것도 부족했던 가즈에는 노력으로 그 모든 걸 극복했지만 대기업 입사 후 또 다른 차별과 멸시와 마주친 뒤 자신만의 해방구를 찾기 위해 매춘부가 됐고, 전도유망한 모범생이었던 미쓰루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타인을 파멸시키는 운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괴물이 된 사연은 스스로의 선택과 판단에 의한 것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악연에 의해 발아되고 증식된 것들입니다. 괴물 같은 미모의 동생 유리코가 없었다면 는 악의로 똘똘 뭉친 괴물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기업 간부와 매춘부라는 이중생활을 영위했던 가즈에는 사립명문 Q중고교에서의 끔찍한 학창생활이 아니었다면 평범하지만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 됐을 인물입니다. , 1등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던 모범생 미쓰루와 모두를 놀라게 만드는 타고난 미모를 지녔던 유리코가 자신들의 현실과 재능에 만족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적인 상황을 맞이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먼 나열식 서사를 통해 이들의 악연과 괴물로의 진화과정을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고 꼼꼼하게 그려냅니다. 순수하지만 동시에 사악했던 10대 시절부터 마흔을 코앞에 둔 시기에 맞이한 각자의 종착역에 이르기까지 마치 일기장을 들여다보듯 네 명의 일생을 지켜본 독자들에겐 그저 씁쓸함만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괴물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들고 싶었다는 기리노 나쓰오의 의도는 완벽하게 성공한 셈인데, 개인적으론 과도한 분량과 작위적인 캐릭터 때문에 좀처럼 이입하기가 힘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네 명의 주인공은 물론 단역에 가까운 조연들까지 극단적으로 일그러지고 비틀린 인물들을 지켜보는 일이 꽤 힘들었는데, 어쩌면 그런 이유로 그로테스크라는 제목이 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들이 모두 여성이다 보니 외모로 평가받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차별의 희생양이 되거나, 때론 본인 스스로의 의지로 머리 좋은 남성에게 의존하려는 여성들에 대한 비판적 담론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출판사 소개글처럼 현대 여성이 처한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작이라든가 여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내면의 괴물적인 본능이나 충동을 깊은 공감대 형성을 통해 치유하는 작품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설정 탓에 혐오감 이상의 공감은 어렵겠다는 생각인데, 어쩌면 제가 여성에 대해 너무 모르는 편협한 남자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네 명의 괴물이 현대 여성을 상징한다거나 여성들의 본능과 충동에 대한 치유를 제공한다는 건 이 작품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홍보성 멘트라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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