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평점 :
1980년대 이래 경제 공황과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져온 베네수엘라. 공포정치와 폭력적 독재는 물론 살인률 세계 1위를 기록한 흉흉한 정국 속에서 30대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감내해야 했던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을 그린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친 아델라이다는 정부의 비호 아래 암거래를 일삼는 ‘보안관’ 일당에게 아파트를 빼앗기고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다. 그러던 중 이웃집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가 사망한 걸 발견한 아델라이다는 그녀 앞으로 발급된 스페인 여권을 통해 신분을 훔쳐 지옥과도 같은 베네수엘라를 탈출하기로 결심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인 ‘스페인 여자의 딸’은 주인공 아델라이다가 아니라 그녀가 신분을 훔치려는 이웃의 죽은 여자 아우로라 페랄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연히 아델라이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제목 자체가 주는 함의와 아이러니가 무척 인상 깊게 느껴졌습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지만 그저 낯설기만 한 이웃, 그래서 이름보다 더 친숙한 ‘스페인 여자의 딸’이란 호칭, 그리고 그녀의 신분을 훔치는 것만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티켓이란 설정은 벼랑 끝에 선 아델라이다가 얻은 마지막 희망이 얼마나 절박하고 절실한지 역설적으로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된 아델라이다가 스릴 넘치는 액션을 펼치거나 기민한 첩보물의 주인공이 되어 베네수엘라를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도 아닙니다. 물론 공포정치가 휘두른 폭력의 민낯과 끔찍한 살상의 기록이 간간이 묘사되곤 하지만 그보다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평범한 30대 여성의 지독한 생존기에 더 가깝습니다. 또, 어린 시절의 아델라이다가 보낸, 가난하지만 평화로웠던 베네수엘라에서의 일상이 지금의 현실과 대비되듯 번갈아 한 챕터씩 배치되어 현재의 그녀의 처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어줍니다.
어머니를 땅에 묻으면서 언제 무장폭도들이 들이닥칠지 몰라 전전긍긍하거나 시신의 뼈까지 탈취하는 무리들이 어머니의 묘를 파헤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 또 난데없는 습격자들에게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기는가 하면 밤마다 이어지는 약탈과 방화에 불을 끈 채 숨죽여야 하는 상황, 그리고 ‘스페인 여자의 딸’로 변신 과정과 탈출 과정에서의 위기일발 등 한 달여에 걸친 아델라이다의 지옥은 어느 장면 할 것 없이 생생하고 강한 인상을 남기지만 무엇보다도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일념 아래 이웃 여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장면은 섬뜩하면서도 애처롭고 안쓰럽게 그려져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번역가 역시 이 장면을 압권으로 꼽았는데, 이 작품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오랫동안 회자될 명장면이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다소 낯선 베네수엘라의 현실을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다 정치적, 역사적 사료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이 별로 없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조금은 거리감 있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몰라도 전혀 지장이 없을뿐더러, 현실의 요소가 그대로 반영되었더라면 오히려 소설 읽기에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지만, 각주나 부연설명이 부족한 탓에 앞뒤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던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 몇 번씩 되읽어도 그 의미나 문맥이 잘 이해되지 않는 난해한 문장들이 간혹 있었는데, 대부분 원작자의 글쓰기 성향으로 보였지만 때론 이해 가능한 의역이 필요해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소개글만 봤을 땐 ‘탈출 스릴러’ 또는 ‘정치적 성향이 짙은 고발성 스토리’를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그런 맥락에서 보면 다소 밋밋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독자에 따라 휴머니즘과 리얼리티의 매력을 만끽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때론 ‘주장’이나 ‘이념’보다 ‘생존’이 탄탄하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의 소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사도 전개방식도 주인공의 캐릭터도 전혀 다르지만 읽는 동안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그에 의해 자행된 무고한 죽음이라는 공통점 때문일 텐데, 다큐멘터리와는 다른 팩션의 힘과 매력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낯선 이국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베네수엘라 여인 아델라이다가 ‘스페인 여자의 딸’이 되어 어둠과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는 이야기에서 깊은 인상과 여운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