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알사냥꾼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염정용.장수미 옮김 / 단숨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세계적인 안과의로 유명한 주커 박사의 실체는 잔혹한 연쇄 강간살인마. 그에게 납치당한 뒤 끔찍한 수술과 강간을 당한 피해자들은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택했기 때문. 하지만 증거도 증인도 없어 그를 구속할 여지가 없던 경찰은 ‘눈알수집가’ 사건에서 활약한 맹인 영매 알리나에게 도움을 청하고, 알리나는 환영 속에서 주커 박사의 다음 희생자를 ‘본다’.
한편 아들 율리안을 살리기 위해 눈알수집가의 요구대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초르바흐는 기적적으로 되살아나지만 자신 때문에 아들이 죽었을 거란 사실에 깊은 절망에 빠진다. 오로지 복수심만으로 살아가게 된 초르바흐는 주커 박사와 눈알수집가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믿으며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병원을 탈출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이 작품은 전작인 ‘눈알수집가’를 읽지 않으면 좀처럼 이입하기도,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상하권으로 분권된 한 편의 작품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건 ‘눈알수집가’의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는 일이라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하긴 했지만) 거의 그대로 인용해야만 했습니다. 또 이어질 서평 역시 대체로 인상비평 수준에만 머물게 될 것 같은데, ‘눈알수집가’를 읽은 독자라면 무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참고해서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이코스릴러’로 분류되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들은 롤러코스터 같은 긴장감 끝에 쾌감을 만끽하게 만드는 일반적인 스릴러와는 달리 무척 불편하고 무겁고 때론 불쾌하기까지 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눈알사냥꾼’은 앞서 읽은 네 편의 작품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특기(?)가 정점을 찍은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주인공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몸과 마음이 모두 거의 폐인에 가까운 상태로 등장합니다. 스스로 머리에 총을 쏘고, 그 후유증으로 환영과 환청에 시달리는가 하면, 범인에게 납치된 뒤 끔찍한 수술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겨우 위기를 벗어났나 싶으면 칼로 난도질을 당하기에 이릅니다. 몸만 괴로운 게 아니라 정신 역시 수없이 바닥을 치며 황폐해지고 마는데, 거기에다 전대미문의 연쇄 강간살인마인 눈알사냥꾼과 희대의 일가족 살해범 눈알수집가가 양쪽에서 협공을 해대고 있으니 그야말로 독자마저 제정신으로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맙니다.
‘감사의 말’을 통해 작가 자신이 “이런 글을 쓰는 걸 보니 좀 이상한 분인 것 같아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고백한 점이나, 작품 속에서 주인공 초르바흐의 입을 통해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나는 할리우드 시나리오를 쓰고 싶지 않다.”, “악(惡)은 그 어떤 경우에도 살아남는다.”라고 거듭 자신의 지향점을 강조하긴 했지만, ‘눈알사냥꾼’에서 펼쳐진 이야기들은 작가의 변(辯)이 순진하게 느껴질 정도로 지독하고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서사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힘이자 마력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다른 작품들에 비해) 지나치게 오버한 나머지 오히려 거부감만 느끼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악은 공포보다는 비현실적인 인상만 남겼고, 악의 동기는 억지로 갖다 붙인 느낌이었으며, 수차례 거듭되는 반전은 ‘반전을 위한 반전’이란 느낌이 더 강할 정도로 작위적이었습니다. 또 ‘눈알사냥꾼’과 ‘눈알수집가’의 협업(?)은 조금도 긴장감을 발휘하지 못했고, 막판에 드러난 진실 혹은 진범의 정체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는데, 진범의 입을 통해 장황하게 사건의 진상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로 앞뒤 정황을 끼워 맞추는 듯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떻게 하면 악을 좀더 세고 독하게 그려볼까, 하는 작가의 노력만 보였을 뿐 스릴러 서사 자체는 뒤죽박죽이 돼버렸다고 할까요?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작품은 매번 “다음에 이 작가의 작품을 또 읽어야 하나?”라는 고민을 남겨주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이유에선지 자꾸만 기웃거리게 되는 게 사실인데, 한국에 소개된 그의 작품 가운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더 많은 편이라 어쨌거나 조만간 또다시 불편하고 무거운 그의 사이코스릴러를 읽게 될 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몽실북클럽에서 올해 8월까지 그의 작품을 ‘스토킹’하는 중이라 부득이 읽어야 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만...)
악이 지독하고 세게 그려지는 건 충분히 매력적인 설정이지만 다음에 읽을 작품에선 그 설정을 뒷받침하는 스릴러 서사의 힘도 함께 느낄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