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잠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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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력적인 폭주 여탐정하무라 아키라의 활약을 담은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입니다. 2020년에 출간된 이별의 수법을 통해 하무라 아키라의 팬이 됐는데,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대부분이지만 기다리던 신간이 308페이지에 불과한 단편집이라 아쉬움이 꽤 컸습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이별의 수법을 순식간에 읽어냈던 걸 기억하면 300여 페이지는 그저 아쉽기만 한 분량이기 때문입니다.

 

하무라 아키라는 기치조지 주택가에 있는 미스터리 전문서점 살인곰 서점의 아르바이트 점원이자, 이 서점이 거의 장난삼아 시작한 백곰 탐정사에 소속된 유일한 탐정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서점 2층 한쪽에 주거 공간 겸 탐정사무실을 얻어 겨우겨우 노숙을 면한 하무라는 자신의 표현대로 불혹의 나이가 넘어 언덕길을 구르는 것처럼 나이를 먹어가고있지만 박봉과 고된 업무는 물론 사람을 험하게 부리는 서점 오너 도야마의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떠맡은 탓에 늘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대형 탐정사 도토종합리서치의 지인 사쿠라이 하지메로부터 이런저런 일거리를 제공받지만 보수도 얄팍하고 하찮아 보이는 의뢰들이 대부분인데, 문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탐정이란 그녀의 별명답게 처음엔 별 것 아니게 보이던 사건들이 어느 하나 쉽고 곱게 끝나는 법이 없다는 점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에서 하무라가 받은 의뢰들은 교도소에서 출소하는 수양딸을 집까지 데려다 달라는 것, 갑자기 소식이 끊긴 연인의 흔적을 찾아달라는 것, 세상을 떠난 지인을 소중히 여긴 그 누군가를 찾아달라는 것 등 대부분 심부름센터나 흥신소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의뢰들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럽고 탁한 연못에서 익사할 뻔하거나, 청소기 코드에 목이 졸리거나 식칼로 찔릴 뻔하거나 심지어 차에 탄 채 산사태에 휘말리는 등 그야말로 목숨을 건 악전고투들을 겪게 돼서 독자 입장에선 그저 한숨과 연민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무라의 매력적인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과 전개는 이별의 수법과 마찬가지로 읽는 내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군더더기나 사족 하나 없이 돌직구처럼 날아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살코기만 가득한 뻑뻑함은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완급 조절과 적재적소의 블랙 유머 덕분에 엄청난 속도감과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피식피식 웃으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다소 아쉬움이 느껴진 것도 사실인데, 중편이나 장편에 어울리는 방대한 설정 때문에 다소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록작이 많았던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의뢰인의 수양딸을 에스코트하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다룬 첫 수록작 거품 속의 나날을 제외하곤 대부분 사건 자체도, 해결 과정도 명료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표제작인 불온한 잠은 단편 속에 욱여넣기에는 인물관계도 많이 복잡했고 핵심인물의 과거사도 이리저리 꼬여있어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유령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도는 해체 직전의 빌딩이 주 무대인 새해의 미궁과 사라진 희귀도서의 행방을 찾다가 그 희귀도서에 집착하는 여러 인물들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러나는 과정을 그린 도망친 철도 안내서도 소재나 사건에 비해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사건 배경은 엄청 복잡합니다. 반면, 이야기의 속도감은 숨이 가쁠 정도로 대단한데, 정작 그것들을 뒷받침해줄 친절한 설명이 부족해서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 코지 미스터리의 여왕’, ‘여성 하드보일드 소설의 진수와 함께 와카타케 나나미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별칭은 단편의 여왕입니다. 이 작품 속의 네 편의 수록작은 사실 찬찬히 뜯어보면 그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들 만한 수작들인 게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와카타케 나나미의 속사포 같은 문장들 때문에 도저히 찬찬히 뜯어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 빠르고 복잡한 단편들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다시 읽어보고 싶은데, 그때라면 단편의 여왕의 진수를 조금은 더 제대로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무라 아키라가 등장하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작품은 모두 여덟 편입니다. ‘나쁜 토끼를 제외하곤 한국에 모두 소개됐는데, 조만간 절판된 작품들까지 포함하여 순서대로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를 마스터하고 싶은 욕심입니다. 특히 13년의 공백(2001'나쁜 토끼' 이후 출간된 작품이 2014'이별의 수법')을 사이에 둔 20~30대와 40대의 하무라 아키라가 각각 어떤 모습들일지 비교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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