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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비밀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4월
평점 :
‘우리 집 비밀’(원제 我が家のヒミツ)은 ‘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에 이은 ‘가족 소설 시리즈’(平成の家族小説シリーズ) 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을 읽진 못했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또 짓궂은 유머와 온기 가득한 울컥함이 담겨 있을 것 같은 능청스런 제목에 눈길이 끌려 따끈따끈한 신간을 얼른 집어 들었습니다.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재미있는 건 그 가운데 ‘우리 집 비밀’이란 수록작은 없다는 점입니다. 즉, 여섯 편 모두 누군가의 또는 어떤 가족의 내밀한 비밀을 다룬다는 공통점 때문에 붙은 제목이란 뜻입니다.
여섯 편의 주인공 혹은 조연들을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비밀들이란 ‘남의 일’로 여기고 들여다보면 실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고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까운 지인은 물론 가족에게조차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소소한 비밀들을 갖기 마련이며 그런 비밀들 중엔 당사자에겐 세상의 절반이 사라져버린 듯한 고통과 상처와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쿠다 히데오는 그런 비밀들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그리면서도 따뜻하고 유쾌한 문장과 주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공감률 100%의 인물들을 앞세워 특유의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합니다.
아이를 갖지 못해 고심 중인 31살의 치과 사무원 아쓰미가 환자로서 치과에 온 유명 피아니스트 - 심지어 아쓰미는 그의 열정적인 팬이기도 합니다. - 를 통해 삶의 지혜와 용기를 얻는 이야기(‘충치와 피아니스트’), 승진 경쟁에서 밀려난 뒤 방황하던 50대 샐러리맨 마사오가 아주 조금씩 자기 자신은 물론 세상과 화해하는 이야기(‘마사오의 가을’), 16살 안나가 친아빠와 길러준 아빠 사이에서 이기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안나의 12월’), 아내를 잃고 우울증과 무기력증에 빠진 아버지를 안쓰럽게 지켜보다가 생각지 못한 곳에서 구원의 손길을 얻는 아들의 이야기(‘편지에 실어’), 옆집에 이사 온 수상한 부부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는 만삭의 임산부의 이야기(‘임산부와 옆집 부부’),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쇠퇴기를 맞이한 탓에 심란해하다가 갑자기 시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아내 때문에 겪게 되는 좌충우돌 감동 스토리(‘아내와 선거’) 등이 실려 있습니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문예지 ‘소설 스바루’에 연재됐던 단편 중 주옥같은 작품들을 엄선해서 엮었다.”는 출판사의 소개글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점은 여러 작품에 등장한 50대 남성들입니다. ‘주옥같은 작품들’보다는 왠지 인생의 후반전 중반쯤을 지나고 있는 ‘50대 남성들’이란 공통점에 맞춰 엄선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과열과 허무의 젊은 날들을 보낸 뒤 뒤늦게 자신만의 세계를 찾거나, 승진 경쟁에서 밀려나 자괴감에 빠지거나, 사랑하던 배우자를 잃고 무기력증에 빠지거나, 작가로서도 가장으로서도 내리막길에 선 자신을 발견하는 인물들이 바로 그들인데,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집필된 시기가 1959년생인 오쿠다 히데오의 나이 53~56세 무렵이란 점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억측이긴 하지만 “젊은이와 나이 든 사람은 눈에 비치는 풍경이 다르다.”(p198, ‘편지에 실어’)는 문장처럼 어쩌면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과 비슷한 풍경을 바라보게 된 50대 남성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이 단편집 속에 녹여 넣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혹은 어느 가족의 비밀’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꽤 씁쓸한 비극의 소재가 될 수도 있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특유의 유머와 따뜻함을 가미해 갑자기 빙긋 웃게 만들거나 갑자기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독자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세상은 냉정하고 비열하고 무자비하지만 어딘가에는 분명 사람들을 웃고 감동하게 만드는 ‘작은 구석’도 존재할 것입니다. 오쿠다 히데오가 매번 그려내는 그 ‘작은 구석들’은 설령 누군가에게는 판타지처럼 읽힌다 해도 제게는 늘 기분 좋은 위안과 안식으로 다가옵니다. 서평을 마치는대로 아직 못 읽은 이 시리즈의 전작들(‘오 해피 데이’, ‘우리 집 문제’)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