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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워크
스티븐 킹 지음, 공보경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중서부 도시에 사는 40대 남자 바튼 도스는 불안과 초조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죽은 아들 찰리와의 추억이 담긴 집과 평생 일해 온 세탁공장이 고속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철거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한두 집씩 정든 땅을 떠나는 가운데 바튼은 새 집을 알아보는 일도, 자신의 업무인 새 공장부지 계약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연기시킵니다. 딱히 무슨 기대나 희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버티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철거일은 점점 다가오고 급기야 바튼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집과 공장을 지키기로 결심합니다.
‘로드워크’는 스티븐 킹이 리처드 바크만(Richard Bachman)이란 필명으로 출간한 작품입니다. 한국에는 “100명의 소년이 1명만 남고 죽을 때까지 걸어야만 하는 죽음의 서바이벌”을 다룬 ‘롱 워크’(2015, 황금가지) 이후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리처드 바크만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은 “현대인의 가치관과 심층적인 문제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정밀히 묘사한 심리스릴러”라는 평을 들었다는데, 그래서인지 ‘로드워크’는 그동안 읽었던 스티븐 킹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과 인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로드워크’는 바튼 도스가 집과 공장을 지키기 위해 고속도로 확장 공사에 맞서 싸우는 사건 위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분노와 저항, 공포와 무기력 등 바튼 도스 내면의 심리를 더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아내와의 갈등, 직장에서의 충돌, 과격하긴 해도 별 소득 없던 물리적 저항 등 철거를 앞두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철거일이 다가올수록 조금씩 무너져가는 바튼 도스의 자아를 집요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낡은 집과 고만고만한 세탁공장을 지켜내고 싶은 절실함에 사로잡혀 있지만 무자비한 고속도로 확장 공사를 벌이는 거대한 힘 앞에서 평범한 개인에 불과한 바튼 도스가 취할 수 있는 마땅한 대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걸 잘 알면서도 바튼 도스는 눈앞에 닥친 현실을 외면한 채 그저 뭉기적거릴 뿐입니다. 마치 그렇게 하다 보면 뭔가 해결될 수도 있다는 허무한 희망 같은 걸 품었다고 할까요?
“나는 이유를 모른다. 당신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대체로 신조차 이유를 모른다.
정부가 하는 일이 원래 그렇다고 한다. 그게 전부다.”
- 1967년 베트남 전쟁에 관한 일반인 인터뷰에서 인용 (p9, 프롤로그 中)
물론 바튼 도스는 현실적인 대책도 준비합니다. 생명보험을 털어 생활비를 준비하고, 거액을 들여 위험천만한 총기를 사들이는가 하면, ‘총공격’을 위해 모종의 계획을 세우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대부분의 시간은 술과 TV프로그램과 끊이지 않는 악몽에 잠식될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그의 내면이 무너져가는 동안 고속도로는 점차 확장되고 현실은 석 달에 걸쳐 그의 모든 것을 천천히 파국으로 몰고가버립니다. 그 석 달이 지난 뒤 그가 선택한 마지막 카드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 작품이 리처드 바크만이 아니라 스티븐 킹의 이름으로 집필됐더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됐을 것입니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충격적인 사건과 함께 스토리는 강한 극성(劇性)과 선명한 전개를 지녔을 것이고, 거기에 스티븐 킹 특유의 공포 코드까지 가미됐을 게 분명한데, 고백하자면, 그런 스타일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탓인지 심리스릴러에 가까운 이 작품의 서사는 장편보다는 중편의 분량에 어울렸을 거라는 아쉬움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물론 문장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듯한 스티븐 킹 특유의 매력은 여전했고, 쉬지 않고 단숨에 마지막까지 달리게 만드는 그의 마력 역시 여느 작품들처럼 강렬했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의 가치관과 심층적인 문제를 다룬 심리스릴러의 대가’ 리처드 바크만이 아니라 ‘호러 킹’ 스티븐 킹의 작품이었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 저만의 소감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스티븐 킹의 중단편집인 ‘별도 없는 한밤에’(2015, 황금가지)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아내를 살해하고 시궁쥐가 득실거리는 우물 속에 사체를 유기한 남자를 그린 ‘1922’라는 작품이 있는데, ‘로드워크’의 홍보카피를 보곤 문득 그 작품과 비슷한 톤이 아닐까 기대했던 게 사실입니다. 혹시 이 작품에서 아쉬움을 느낀 독자라면 스티븐 킹의 매력이 철철 넘치는 3편의 중편과 1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별도 없는 한밤에’를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리처드 바크만의 이름으로 발표된 ‘롱 워크’는 번역의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독특한 설정을 다루고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