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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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 소녀 에이미가 실종된 뒤 용의자로 지목된 건 실종 당일 아르바이트 베이비시터로 에이미를 돌봤던 10대 소년 키이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의 의혹과 편견 섞인 시선이 키이스에게 쏟아진다. 키이스의 아버지 에릭 무어는 아들의 무죄를 믿지만 사건 당일 밤 키이스의 불확실한 행적이 마음에 걸린다. 안 그래도 폐쇄적이고 반항적이던 키이스가 사건 이후 노골적인 적의까지 드러내자 에릭은 혼란에 빠진다. 시간이 지나도 에이미는 발견되지 않고, 에릭의 삶 전반에 걸쳐 모든 걸 부식시키는 의심과 거짓의 소용돌이가 몰아닥치기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가족사진은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 (p13)

이 작품 본편의 첫 문장입니다. 모두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은 그것은 모두 거짓이거나 혹은 돌이킬 수 없이 쩍 벌어져버린 균열을 감추려는 어설픈 위장이라는 게 작가가 독자에게 건넨 이 작품의 불길하고도 섬뜩한 첫 인상인 셈입니다.

키이스가 소녀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의심받는 가운데 약 2주가 지난 뒤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는 미스터리 구도는 무척 심플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정체는 범인 찾기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아주 지독한 심리스릴러입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무한대로 자라나는 에릭 무어의 의심과 불신, 두려움과 공포가 이야기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에릭에겐 두 개의 가족이 있습니다. 부모님과 형과 여동생으로 이뤄진 옛 가족, 아내 메러디스와 아들 키이스가 있는 현재의 가족이 그것입니다. 불행하게 해체됐던 옛 가족의 상처 때문에 에릭은 일본단풍나무가 드리운 숲속의 집에서 자신이 꾸린 현재의 가족을 소중히 가꿔왔지만, 아들 키이스가 에이미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받으면서 그 소소한 행복은 산산조각 납니다. 애초 아들 키이스의 불확실한 행적과 거짓말에 국한됐던 그의 의심은 우연과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이미 해체된 옛 가족들은 물론 사랑하는 아내에게까지 확대되고 맙니다.

사업 실패로 전 재산을 날린 폭군 같던 아버지의 음모,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끔찍한 사고의 진실, 아버지에게 멸시당한 끝에 무능한 알코올중독자로 전락한 형의 비밀 등 그동안 은폐됐던 옛 가족의 민낯과 마주한 에릭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나머지 그 의심의 칼끝을 아내 메러디스에게까지 들이대게 된 것입니다.

 

의심은 산()이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산과 마찬가지로) 의심은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p114에서 발췌)

 

에릭의 의심은 때론 모르는 게 나았을 추악한 진실과 마주치기도 하고 때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기도 합니다. 이미 해체됐던 옛 가족은 다시 한 번 무참한 해체를 겪게 되고, 현재의 가족 역시 의심이라는 산()에 의해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고 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에릭이라는 인물이 어딘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거나 치명적인 의심병 환자로 설정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에릭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아버지이자 남편일 뿐입니다. 끝없이 바닥을 향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에릭의 의심이 더 생생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에릭의 평범함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의심에 하도 심하게 시달린 탓에 그 나뭇가지 밑에 보이는 것이 피가 고인 웅덩이인지, 아니면 그냥 흩어져 있는 붉은 낙엽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p344)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붉은 낙엽아름답고 또 그만큼 고통스러운 작품입니다. “(자기파괴적인 자세와) 자학적인 경향이 쿡의 작품에서 풍기는 기묘한 아름다움과 매력의 진정한 원천이 아닐까.”라는 평가도 실려 있는데, 사실 꽤나 불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읽은 작품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옮긴이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이 이중적인 여운은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인상적인 클라이맥스와 엔딩 덕분이란 생각인데, 그래서인지 여기저기서 보고 들은대로 이 작품이 토머스 H. 쿡의 대표작이란 평이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붉은 낙엽은 물론 앞서 읽은 채텀 스쿨 어페어’, ‘밤의 기억들’, ‘브레이크하트힐모두 개인적인 취향에 잘 맞는 작품들은 아니지만, 이상하게도 토머스 H. 쿡에게 번번이 끌리는 것은 어쩌면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라는 마약 같은 매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앤솔로지를 제외하면 한국에 소개된 그의 작품 가운데 줄리언 웰즈의 죄심문이 남은 셈인데, 연이어 토머스 H. 쿡을 읽는 것은 꽤나 부담스럽긴 하지만 다음엔 어떤 아름다우면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 사뭇 기대되는 것 역시 사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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