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야 보석점 고객 감사파티가 끝난 뒤 컴패니언(행사나 파티에서 내빈 안내 및 접대 담당)인 에리가 호텔방에서 사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하지만, 절친이자 동료인 교코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 특히 자신의 신데렐라 꿈 속 주인공이자 당일 파티에 참석했던 부동산회사 간부 다카미까지 에리의 죽음에 관심을 갖자 교코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된다. 우연히도 담당 형사 시바타와 이웃이 된 교코는 그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려 애쓴다. 시바타와 함께 에리의 고향 나고야를 찾은 교코는 몇 년 전 에리의 연인이던 무명화가가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무렵 도쿄에서는 또 다른 살인사건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그녀는 다 계획이 있다1985방과 후로 데뷔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4년 만인 1988년에 통산 일곱 번째로 발표한 작품입니다. 말하자면 신인은 아니더라도 아직은 거장 혹은 공장장에 등극하기 전의 초기작이란 얘긴데,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조차 보이지 않는 1980년대라는 배경묘사만 제외한다면 특별히 그의 초기작이란 냄새를 감지하기 쉽지 않은 작품입니다.

 

행사나 파티에서 내빈 안내 및 접대를 담당하는 컴패니언은 겉으론 화려해 보이지만 실은 무척이나 고달프고 숱한 희롱에 시달려야 하는 직업입니다. 교코는 꽤 유능한 컴패니언이지만 그녀에겐 명확한 계획이 있습니다. 어떻게든 왕자님을 사로잡아 “800만 엔짜리 보석쯤은 채소 한두 개 사듯 툭툭 살 수 있는상류층이 되는 것입니다. 대놓고 속물적인 캐릭터이긴 하지만 동시에 교코는 솔직담백하고 정의롭고 호기심 가득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경찰 가운데 에리의 죽음에 대해 유일하게 의문을 품은 형사 시바타는 이 작품에서 이웃의 민간인교코와 파트너가 되어 진상 규명에 나서는 인물인데, 교코가 왕자님 후보로 삼은 부동산회사 간부 다카미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극과 극의 처지라 남다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어딘가 석연치 않은, 하지만 동기도 단서도 증거도 없는 여러 용의자들이 등장하고, 처음엔 단순해 보였던 사건 구도 역시 시간이 갈수록 점점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거기에다 밀실트릭을 비롯 다양한 도구들을 이용한 갖가지 트릭이 등장하면서 교코와 시바타의 수사는 수시로 벽에 막히곤 합니다.

이쯤 되면 꽤나 무겁고 묵직한 이야기가 전개될 게 분명해 보이는데, 실제로 여러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사건의 진상은 더할 나위 없이 비극적이긴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교코와 시바타라는 두 주인공의 케미를 통해 특유의 가볍고 통통 튀는 서사를 만들어냈고, 덕분에 마지막 장까지 재미에 충실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도쿄와 나고야를 오가며 현재와 과거의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교코와 시바타의 행보는 진지한 콤비 수사물의 매력과 함께 달달한 분위기를 내뿜는 로코의 재미까지 겸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거움을 가볍게 풀어내는 실험이라는 역자 후기의 부제는 아마도 이런 맥락에서 지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한 작가와 함께 나이 들어가면서 그가 새내기 시절에 절치부심, 반전에 반전을 공들여 담아 넣은 작품을 다시 만난다는 것은 힘든 시절의 작고 소중한 기쁨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역자 후기의 마지막 문장에 무척 공감했는데, 개인적으로 딱히 치기 어린 새내기의 느낌을 받진 못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이 주는 남다른 감회를 만끽한 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소 무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를 배배 꼬고 여러 트릭들을 배치하긴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격적인 공장장이 된 뒤 출간한 다소 허술하고 가벼운 작품들에 비하면 오히려 더 진정성이 진하게 배어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원제는 (마지막 챕터의 소제목인) ‘윙크로 건배’(ウインクで乾杯)입니다. 사실 원제 자체가 좀 모호하고 뜬금없긴 해서 별도의 번역 제목이 필요했다는 건 이해되지만, 내용과 별 관련 없으면서도 시중의 유행어에 기댄 듯한 번역 제목은 더 뜨악한 느낌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