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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평점 :
휴양 차 그동안 여러 사건으로 인연을 맺었던 오카야마 현을 다시 찾은 긴다이치 코스케는 현경의 이소카와 경부로부터 23년 전 귀수촌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대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피살된 남자의 미망인이 운영 중인 한적한 온천 ‘거북탕’을 숙소로 소개받습니다. 사건에 관심이 끌린 코스케는 귀수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23년 전 사건에 대해 탐문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귀수촌 출신으로 인기 연예인이 된 오조라 유카리가 명절을 맞아 귀향하자 젊은이들은 한껏 들떠 축제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그 축제의 날을 시작으로 유력가문의 딸들이 차례로 살해됩니다. 코스케는 뒤늦게야 옛날에 유행했던 공놀이 노래의 불길한 가사가 그녀들의 죽음과 연관 있음을 깨닫습니다. 또 23년 전 살인사건이 이번 연쇄살인과 무관치 않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10여 년 전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처음 만났던 작품이 ‘악마의 공놀이 노래’입니다. 덕분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 됐고 그 뒤로 시리즈 작품들을 한 편씩 찾아 읽게 된 건데, 그래서인지 다른 작품들보다 더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상 깊었던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다행스럽게도(?)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아 마치 처음 읽는 느낌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는 공놀이 노래 가사가 실린 프롤로그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귀수촌의 부와 권력을 양분했지만 지금은 명암이 확실하게 갈린 두 개의 유력가문, 마을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고 있는 어딘가 수상쩍은 귀수촌의 촌장, 인적 없는 고갯길을 넘어 귀수촌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노파, 그리고 뛰어난 미모를 지닌 유력가문의 딸 등 긴다이치 코스케가 마주한 귀수촌의 인물들은 하나 같이 불온한 기운을 지니고 있습니다.
명절 축제와 의문의 실종사건이 한꺼번에 터져 온 마을이 뒤숭숭한 가운데 공놀이 노래가사에 맞춰 벌어진 참극은 기이하다 못해 극도의 공포심을 자극하는데, 희생자들이 누군가 명백한 의도를 갖고 꾸민 엽기적인 상황 속에서 발견된 것도 문제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귀수촌의 유력가문의 딸들이라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더 깊은 혼란에 빠뜨립니다.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23년 전 사건과 현재의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는 긴다이치 코스케의 행보도 바쁘고 복잡하게 오가는 탓에 어떤 작품보다도 집중력이 더 요구되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분명 범인은 귀수촌 사람 가운데 하나지만 긴다이치 코스케도 이소카와 경부도 좀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해 혼란에 빠지는데, 여기서 결정적인 실마리 노릇을 하는 게 바로 오래 전 유행했던 섬뜩한 공놀이 노래의 가사입니다.
“어여쁘지만 술고래인 술잔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구두쇠인 저울 집 아가씨, 어여쁘지만 돌계집인 자물쇠 집 아가씨” 등 3절에 걸쳐 등장하는 ‘어여쁜 아가씨’들은 하나같이 “퇴짜맞았네”라는 가사로 마무리되는데, 실은 이 노래의 연원을 따져 올라가면 “퇴짜맞았네.”는 “살해당했네.”와 같은 의미로 해석됩니다. 뒤늦게 이 노래를 알게 된 긴다이치 코스케는 범행의 윤곽은 눈치 챌 수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범행 동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 답답할 따름입니다.
막판에 드러난 23년 전 사건의 진실과 현재 연쇄살인 사이의 접점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던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들, 즉 끝없는 탐욕, 추잡한 욕망, 이루 말할 수 없는 증오와 복수심 등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에도 속이 시원하다거나 통쾌함 같은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가슴 한쪽에 큰 돌덩이가 턱 얹힌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엔딩을 장식하곤 있지만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그 무게감 자체가 사뭇 달라 보인 작품이었습니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1959년에 연재가 완료된 작품인데, 한국에 소개된 그 다음 작품은 1976년에 출간된 ‘가면무도회’입니다. (2021년에 출간될 ‘미로장의 참극’ 역시 1976년 작품입니다.) 무려 17년의 간극이 있는 셈인데, 그것은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후 눈에 띌 만한 작품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요코미조 세이시가 1964년부터 거의 10년 간 절필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해설’에 따르면 ‘악마의 공놀이 노래’ 이후 “시쳇말로 고리타분한 작가가 돼 버린” 요코미조 세이시는 미스터리의 새로운 흐름과 영미권 작품의 신선함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그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기까지 무려 1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다시 읽기’는 이제 ‘가면무도회’와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 단 두 편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2014년 이후 7년 만에 한국에 새 작품(미로장의 참극)이 출간될 예정이라 더없이 반갑긴 하지만, 좀더 많은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가 추가로 소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0세기 중반의 올드한 작품들이긴 해도 다른 데선 맛볼 수 없는 투박하면서도 특별한 맛이 잔뜩 배어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