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1년 3월
평점 :
7년 전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공습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는 미증유의 사태에 직면했습니다. 가까스로 개발한 치료제가 인간 외에는 효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의 위험 때문에 육류 소비에 공포를 느낀 인류가 채식에만 의존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일본의 유전공학자 후지야마가 ‘식용 클론(복제인간)’ 생산을 주장합니다. 격론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일본 도처에 식용 클론을 키우고 도축하는 가공시설이 들어서기에 이릅니다. 후지야마는 일약 인기 정치인으로 발돋움하는데, 어느 날 그에게 두 개의 사건이 한꺼번에 벌어집니다. 하나는 식용 클론 반대운동의 리더를 살해한 용의자로 몰린 일이고, 또 하나는 누군가 그에게 살처분 과정에서 반드시 제거됐어야 할 식용 클론의 머리를 협박장과 함께 배달한 일입니다.
이 작품보다 한국에 먼저 소개된 시라이 도모유키의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이것이 일본을 휩쓴 특수설정 미스터리다!”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대로 상상을 초월하는 특수설정을 통해 엽기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입니다. “기발함을 넘어 속을 불편하게 만드는 설정과 묘사를 태연히 구사하는 대목에선 작가의 뇌 구조가 궁금해질 뿐이었다.”라는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독특한 작품이었는데, 시라이 도모유키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능가하는 엽기적인 미스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자신이 제공한 체세포로 생산된 클론만을 먹을 수 있으며(즉 타인의 클론은 먹을 수 없음), 도축된 클론은 소비자에게 배송되기 전 반드시 머리를 제거해야 한다는 나름 윤리적인 규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동물성 단백질이 희귀해진 인류가 육류 소비를 위해 속성으로 키워진 자신의 클론, 즉 인육을 식탁 위에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식용 클론 반대론자들이 도처에 세워진 가공시설을 ‘동양의 아우슈비츠’라고 부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서사 없이도 충분히 세기말적 호러물 한 편을 완성시킬 수 있는 소재지만 작가는 거기에다 살인, 협박, 폭력, 복수 등 다양한 미스터리 코드를 결합시켜 좀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야기를 완성시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소개할 순 없지만 흥미로운 반전을 일으키는 절묘한 트릭까지 더해져서 마지막까지 범인의 정체를 미궁에 빠뜨리는데, 눈치 빠른 독자들은 중반부쯤 느껴지는 위화감 덕분에 일찌감치 진실을 알아챌 수도 있겠지만 막판 에필로그까지 철저하게 숨겨둔 작가의 히든카드에 결국 뒤통수를 얻어맞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 작품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보다는 ‘윤리’에 관한 제법 묵직한 주제의식을 내포한 작품입니다. 아무리 미화해도 결국 식인(食人)에 다름 아닌 식용 클론의 도덕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폭력적으로 사육당하는 클론의 ‘인권’ 문제라든가, 샐러리맨의 평균 연봉을 웃도는 식용 클론의 가격에서 비롯되는 ‘유전육식 무전채식’이라는 계급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작품 곳곳에 심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런 세상이 도래한다면 윤리고 나발이고 동물성 단백질을 더 숭배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장면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미스터리 작품이니 거기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면... 실은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에서 느꼈던 아쉬움보다는 덜 하긴 해도 여전히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진 게 사실입니다. 두 작품 모두 트릭의 실체를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분량과 장황하기까지 한 변(辯)들이 동원되는데, 문제는 그 설명들이 대체로 억지스럽게 끼워 맞춘 듯한 인상이 강했다는 점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정교한 설계를 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읽는 독자 입장에선 결과를 위해 과정을 꾸민 것처럼 보였다고 할까요?”라는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의 서평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그런 아쉬움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34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지만 극단적인 평가와 격론 끝에 대상에서 제외됐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이 독자들 사이에서도 꽤 큰 호불호를 일으킬 건 분명해 보입니다. 개인적으론 미스터리 자체보다도 식용 클론이라는 세기말적 호러 코드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는데 그 부분에 좀더 주목한다면 의외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책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작가가 ‘인간 시리즈’라고 부른다는 후속작들(‘도쿄 결합 인간’, ‘잘 자, 인면창’)까지 마음 편하게 읽을 자신은 없는 게 사실인데, 어떤 설정이 깔려있는지에 따라 꽤나 고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