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수탑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양친을 잃고 백부의 보호 아래 성장한 오토네는 어느 날 갑자기 백억 엔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의 상속자가 됩니다. 미국에 산다는 일면식도 없는 가문의 노인은 상속의 조건으로 자신이 특정한 남자 다카토 슌사쿠와의 결혼을 내걸었는데, 오토네는 결국 그를 만나보지도 못합니다. 슌사쿠는 오토네의 백부의 생일파티가 열리던 호텔에서 참혹하게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이후 백억 엔의 유산은 가문의 후예들에게 1/N로 분할 상속되는 걸로 결정되는데, 문제는 그 결정 이후 상속후보자들이 하나둘씩 살해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용의자로 지목받은 오토네는 엉겁결에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빼앗은 사악한 남자와 함께 살인이 난무하는 유산상속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삼수탑은 앞서 읽은 시리즈들에 비해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 작품입니다. (한국 출간기준으로 직전 작품인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에서도 살짝 그런 기운이 엿보이긴 했지만)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살인사건이 연이어 등장하는 통속 스릴러의 분위기가 굉장히 강한 점, 사디즘 혹은 퇴폐적이고 문란한 성()이 꽤 노골적으로 묘사된 점, 그리고 처음으로 여성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한 점이 그것입니다.

 

유산상속을 둘러싼 참혹한 살인극이란 설정 자체는 본격 미스터리의 좋은 소재이긴 하지만 삼수탑속의 살인사건에는 별다른 트릭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 해법 역시 본격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먼 지극히 일반적인 방식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좀더 많은 유산을 차지하려는 상속후보자들(과 그의 측근들)의 탐욕스럽고 변태적인 모습들이 도드라지게 묘사되는 것은 물론 음란한 피가 흐르는 가문의 기질이 적잖은 분량에 걸쳐 집요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 성폭력의 피해자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욕정에 사로잡혀 가해자를 동경하게 된 여성, 한 남자를 연인으로 둔 쌍둥이 자매, 양아버지와 부적절한 관계인 의붓딸, 두 배 가까운 나이차의 미소년을 으로 둔 지방덩어리 중년여성 등 백억 엔의 유산을 놓고 경쟁을 벌이는 가문의 후예들은 하나같이 자기비하적이거나 엽기적이거나 변태적인 여성들이라서 다분히 선정성을 염두에 둔 의도적인 설정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이 작품이 출간될 무렵인 1950년대 중반의 일본은 퇴폐와 허무가 판치는 가운데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콘텐츠들이 범람하던 시절이며, 요코미조 세이시 역시 당시의 유행에 편승하여 본격 미스터리에 충실했던 시리즈 초기작들과는 확연히 결이 다른 작품을 내놓은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 입장에선 미스터리의 성격도,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도 다소 당혹스럽게 읽힐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다 주인공 오토네가 1인칭 화자로 등장한 탓에 긴다이치 코스케의 비중과 분량은 거의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당혹감과 아쉬움이 함께 들 수밖에 없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끔찍한 연쇄살인극에 단단하게 묶어두는데, 가장 주목을 끄는 건 범인의 동기입니다. 한 푼이라도 유산을 더 차지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외의 다른 특별한 목적을 위해 참극을 일으키는 것인지 막판까지 그 동기를 추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된 희생자가 12명으로 (작품해설에 따르면) 시리즈 역대 최다를 기록한 점도 독자들에게 숨 돌릴 틈조차 없는 긴박감을 선사하는 대목입니다.

비록 긴다이치 코스케의 존재감은 미미하지만,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유산상속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오토네의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서 미스터리 못잖은 서스펜스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라는 생각입니다.

 

당혹감과 아쉬움 속에서도 어느 작품 못잖게 재미있게 읽은 게 사실인데, 그런 면에서, “‘삼수탑을 본격 미스터리의 잣대로 재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뒷맛만 개운치 못하다. 허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준비한 서스펜스 롤러코스터에 몸을 싣는 것이 어떨까.”라는 작품해설속 한마디는 이 작품의 참맛을 만끽하기 위한 적절한 조언으로 보입니다. 다만,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않은 독자라면 삼수탑이누가미 일족이나 여왕벌처럼 긴다이치 코스케가 전면에서 활약하는 작품들을 먼저 접한 뒤에 천천히 읽을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