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마늄 라디오 - 제119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하나무라 만게츠 지음, 양억관 옮김, 장정일 해설 / 이상북스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수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로오는 사회에 나갔다가 22살에 살인을 저지르고 수도원으로 도피합니다. 수도원장은 은닉의 대가로 은밀한 특별봉사를 요구했고, 그걸 수락한 로오는 부속 농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수녀 지망생인 아스피란트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진 로오는 농장에서의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과 고행을 통한 카리스마 덕분에 수도원 청소년들의 우상이 됩니다. , 신부 앞에서 신과 종교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숨기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보다 연상인 수녀를 범할 계획을 고해성사를 통해 사전에 용서받고 실행에 옮기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습니다.

 

나는 소설을 통해 나의 독자를 건강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다소 엽기적이기까지 한 표지를 열고 첫 장을 열자마자 눈에 훅 들어온 작가의 일성은 일종의 경고처럼 보였습니다. 독자를 우울하게 만들고 싶다? 왠지 그 정도에 그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론 크게 빗나가지 않은 예감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물론 조연들의 캐릭터도, 줄거리도 파격의 수준을 한참 넘어선 작품인데, 한국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19금 판정을 내린 건 어쩌면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그런 반향을 일으켰는데 동시에 119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살인을 저지른 로오가 수도원으로 돌아와 겪는 부적절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위험천만한 관계와 사건들로 채워집니다. 덧붙여, 로오가 10대 초반 시절에 겪은 수도원에서의 악몽들이 중간중간 끼어들곤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두드러진 화두는 신과 종교입니다. 로오는 때론 극단적인 무신론자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누구보다 신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신의 구원을 바랐던 순간에 그 어떤 손길도 얻지 못한 그는 현재는 명백한 의도를 갖고 신과 종교를 비아냥댑니다. 특히 종교를 성()과 결부시키는, 일종의 금기를 도발에 가깝게 토로하곤 합니다.

 

모든 쾌감의 본질은 반복이다. 기도와 성행위가 바로 그런 점에서 하나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종교의 진정한 쾌락을 이해해 가고 있었다. 자아 없는 반복, 그것이 최고다.” (p55)

 

사실, 다 읽고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었던 건, 신과 종교, 성과 폭력을 이런 식으로 노골적이고 디테일하게 그리고 있으면서도 딱히 집중해야 할 게 뭔지 모호했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통해 종교의 본질과 인간의 이중성을 날카롭게 파헤치는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깊은 뜻은 활자는 물론 행간에서도 명확히 읽히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탕아가 회개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그렇다고 신과 종교의 허구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성과 폭력에 빠진 채 금기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를 탐미적으로 팔로우한 이야기도 아닙니다. 작가의 첫 일성대로 우울하고 불편한 책읽기가 된 건 사실인데, 작가와 주인공이 지향하는 바조차 알 수 없으니 그저 우울함불편함만 남았다고 할까요?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를 보면 기승전결이나 등장인물의 행동 이유를 무시해버리는 서사성이 희박한 작품을 연속으로 발표했다.”라고 돼있는데, 그렇다면 저의 몰이해가 오히려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에 실린 장정일의 해설을 통해 미처 알아보지 못한 이 작품의 진가를 조금이나마 건질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표피적인 해석 또는 본문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만 담겨 있어서 솔직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르마늄 라디오는 하나무라 만게츠가 종교를 주제로 기획한 대하소설 왕국기의 도입부 격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걸 보면 분명 종교가 첫 번째 화두인 건 맞는 것 같은데, 어쩌면 수도원에서 금기와 파격을 자행하던 로오가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는 과정이 이후 작품에서 그려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선 그 뒷이야기가 딱히 궁금하진 않지만 말입니다.

사족으로, “독자들의 말초감각을 건드리려는 목적으로 금기에 도전한 책은 아니다.”라는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대로 엉뚱한 호기심으로 읽을 책은 아니란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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