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ㅣ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몰락한 귀족 츠바키 히데스케가 의문투성이의 기괴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는 전대미문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렸다가 수상쩍은 알리바이를 대고 겨우 혐의를 벗어난 직후 자살한 터라 의혹은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츠바키의 딸 미네코의 의뢰로 저택을 방문한 긴다이치 코스케는 주인의 몰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황량한 저택의 분위기는 물론, 현재 그곳에 머물고 있는 츠바키의 친인척들의 음험한 태도에 한기를 느낍니다. 더구나 여기저기서 죽은 츠바키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가 죽기 전 작곡한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가 녹음된 레코드가 누군가에 의해 수시로 저택에 울려 퍼지면서 귀기 어린 공포가 모두를 사로잡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불길한 예상대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참극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분신사바를 연상시키는 모래점, 불길한 모양의 피부 반점, 죽은 귀족이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정황, 그리고 소름 끼치는 멜로디의 플루트 곡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등 호러 코드가 다분한 작품입니다. 거기에다 메이지 유신 이후 부귀영화를 누리던 귀족들이 패전의 그늘 속에서 하루아침에 몰락을 맞이한 시대적 배경까지 덧붙여져서 작품을 지배하는 분위기는 더욱 서늘하고 기괴해질 뿐입니다.
“나는 이 이상의 굴욕, 불명예를 참을 수가 없다. 유서 있는 츠바키 가문의 이름도 이것이 폭로되면 수렁에 빠지고 만다. 아아, 악마가 와서 피리를 분다. 나는 아무래도 그날까지 살아 있을 수가 없구나.” (p33)
츠바키 히데스케가 남긴 이 유서는 온통 수수께끼 같은 말만 가득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다시 떠올려보면 행간에 숨은 비통한 사연들이 절절이 느껴지는 탓에 자살을 결심한 그의 심정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했을지 어렵지 않게 수긍하게 됩니다.
애초 희대의 강도살인범으로 몰린 것이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한 ‘굴욕’의 원인으로 추정됐지만 긴다이치 코스케는 그가 혐의를 벗기 위해 마지못해 진술했던 ‘미묘한 알리바이’에 더욱 주목합니다. 강도살인사건 발생일을 전후하여 그가 머물렀다는 고즈넉한 여관을 찾아간 코스케는 여러 사람의 진술을 통해 츠바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내의 친인척들이 연루된 끔찍한 과거사를 눈치 채는데, 문제는 단서가 잡힐 만하면 누군가에 의해 그 단서가 차단되거나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다루는 살인의 동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막장 그 자체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 또 그 탐욕이 낳은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바닥없는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죽어 마땅한 인물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치렀다는 개운함보다는 끔찍한 살인극을 저지른 범인의 심정과 기괴한 제목의 플루트 곡을 작곡한 뒤 자살을 선택한 귀족 츠바키의 고뇌가 남긴 씁쓸한 여운이 더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본편 뒤에 실린 ‘작품해설’에서도 지적됐지만 다 읽은 뒤에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소 어수룩하거나 허점이 엿보이는 설정들이 떠오르는 게 사실입니다. 호러 코드는 다소 억지스러웠고, 범인의 계획이나 살인행위도, 또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도 우연 또는 비약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반에 흐르는 귀기 어린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이런저런 단점이나 아쉬움을 떠올릴 틈도 없이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아마도 이런 게 거장의 마력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물론 취향이 안 맞는 독자에겐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눈에 띄겠지만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에겐 또 한 번 이 시리즈의 매력을 진하게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돼줄 것이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