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자나무
아야세 마루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옮긴이의 말대로 이 작품은 연애소설도, 환상소설도, SF도 아닌, 그 사이의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된 독특한 작품집입니다. 대부분의 작품의 모티브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 속 일곱 개의 사랑(대부분) 너무나도 기괴한 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마치 외계나 이계의 생명체에게 어울리는 낯선 감정처럼 와 닿습니다.

 

신체를 자유자재로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세상, 사랑이나 행복은 물론 죽음마저도 몸 안에 숨어든 날벌레의 생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설정, 사랑에 상처받으면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들, 세 번의 산란을 마친 여자와 적정 수준 이상의 를 뿌린 남자는 급격한 노화 끝에 사망하는 평균 수명 20대 중반인 사회 등 이 작품 속에 그려진 시공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특별함과 기괴함으로 포장돼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하고도 기괴한 시공간에서 그려지는 감정은 너무나도 애틋한 사랑입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기괴한 시공간은 그 사랑의 애틋함을 더욱 진하고 농밀하게 만듭니다.

표제작인 치자나무에는 10년의 불륜을 청산하는 자리에서 불륜남에게 추억의 징표로 한쪽 팔을 요구하는 여자가 등장합니다. 여자는 그 팔을 꽃병에 담아 소중히 대하는 것은 물론 외출할 때나 잠을 잘 때에도 항상 곁에 두는 등 이별 후에도 그 사랑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불륜남의 아내가 나타나 예상치 못한 요구를 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꽃벌레는 운명 같은 사랑과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이 실은 당사자들의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몸에 침투한 한낱 날벌레의 조종의 결과라는 설정이 등장합니다. 누군가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가짜 감정에 괴로워하지만 누군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벌레의 산물인 사랑과 행복을 소중히 지키려 합니다.

네 번째 수록작인 짐승들에는 뱀으로 변이하여 남자를 잡아먹는 여자가 등장하는데, 그 변이는 상대를 너무 사랑해서 견디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받았을 때 작동하는 특별한 기제입니다. 여자들과 낮과 밤을 나눠 살아가는 남자들은 그 뱀이 사랑 때문에 상처받은 여자의 화신이란 건 생각도 못하고 끔찍한 괴물로 여겨 잔인하게 처치합니다.

 

수록작 중에는 지극히 일반적인사랑의 이야기도 있고, 폭압적인 현실에서 도피하여 일그러진 애정을 발산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작품집 안에 들어있어서 그런지 그 이야기들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애증도 결코 평범하게 읽히지는 않습니다. 세상엔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도 있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라며,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특별한 감정에 푹 몰입하다 보면 문득 스스로 그 기괴한 시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로테스크.

아마, 이 작품을 단어 하나로 설명해달라고 하면, 더없이 진부하고 게으른 답이지만, 이보다 더 적확한 답은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불편한 책읽기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 같은데, 개인적으론 그 어떤 사랑 이야기보다 깊은 인상과 여운을 받은 작품이라 작가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다시 내놓는다면 허겁지겁 찾아 읽을 게 분명할 것 같습니다.

 

여담 한 가지만...

아야세 마루는 2010꽃에 눈멀다’()라는 작품으로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R-18 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작가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보 미스미의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와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도 이 문학상 출신이라 여느 일본의 문학상보다 더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 모두 19금 판정을 받았습니다.) 같은 상을 받은 아야세 마루의 이력 때문에 검색을 해보니 한국에도 이미 이 문학상 수상작품이 몇 편인가 출간된 걸 알게 됐는데, 아야세 마루 덕분에 제 취향에 잘 맞는 일본 작가와 소설들을 발굴할 수 있게 돼서 그저 반가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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