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열쇠 열린책들 세계문학 265
대실 해밋 지음, 홍성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장르를 불문하고 20세기 중반에 출간된 고전(에 가까운 작품들)을 자주 읽게 됐는데, 고백하자면, ‘유리 열쇠는 읽기 전에 꽤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우선, 몇 년 전에 읽은 대실 해밋의 대표작 말타의 매’(또는 몰타의 매’)가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고, 당시 쓴 서평에도 “‘사건만 있고 사람은 잘 안 보이다보니 딱딱한 뒷맛만 남았다. 영미권 하드보일드는 나와는 그리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쓸 정도로 큰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 하필 며칠 전 일본 하드보일드의 대표작가인 하라 료의 신작 지금부터의 내일을 읽곤 당분간은 국적(?)을 불문하고 하드보일드는 멀리 하려는 생각을 한 탓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전이 풍기는 유혹과 함께, 북유럽 최고의 탐정 소설에 주어지는 문학상인 유리 열쇠상의 유래가 된 작품이란 점, 또 오래 전에 인상 깊게 본 영화 밀러스 크로싱의 모티브가 된 작품이란 점 등 여러 가지 기대감이 들기도 해서 하드보일드에 대한 씁쓸한 기억들은 싹 지워버리고 거장 대실 해밋과 다시 한 번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폴 매드빅은 합법과 불법, 음지와 양지를 오가며 세력을 넓혀 가는 도시의 거물이며, 네드 보몬트는 그런 매드빅의 브레인이자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는 인물입니다. 선거를 앞두고 자신이 후원하는 상원의원의 승리를 위해 매표 행위도 서슴지 않던 매드빅은 상원의원의 딸 재닛을 좋아하며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속내를 보몬트에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상원의원의 아들이자 재닛의 오빠인 테일러가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후 사건 관련인물들에게 매드빅을 비난하는 내용이 담긴 수상한 편지가 날아들기 시작하고, 언론마저 살인사건과 관련하여 매드빅을 의심하는 기사를 내보냅니다. 도박중독자지만 냉정하고 합리적인 브레인이기도 한 보몬트는 정치적 긴장감이 도사린 이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점점 불리해지고 급기야 매드빅과의 관계도 위태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역시 하드보일드는 저와는 궁합이 잘 안 맞는 장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작품입니다. 주인공 네드 보몬트의 매력적인 캐릭터라든가 몇 차례의 반전과 의외의 범인 등 충분히 흥미진진한 요소를 갖춘 이야기지만, ‘역자 해설에 언급된대로 등장인물의 내적인 감정과 생각을 배제한 채 그들의 행동과 주변의 정황만으로 글을 이끌어 가는방식은 무미건조함은 물론 때론 너무 불친절하다는 인상까지 남기면서 몰입하기도 어렵고 공감하기도 어려운 책읽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세세한 내면 묘사 때문에 도무지 페이지가 안 넘어가는 일부 심리스릴러 작품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기름기 하나 없는 퍽퍽한 살코기 같은 정통 하드보일드 역시 그에 못잖게 소화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원조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대실 해밋의 작품이니 그 퍽퍽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다른 인물은 논외로 치더라도 주인공인 네드 보몬트의 속내나 감정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는데, 그의 말이나 행동에 궁금한 점이 너무 많았고, 특히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탐정으로서의 역할에선 앞뒤 맥락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종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금주법이 시행되고 범죄가 난무하던 시대에 태어난 작품이다 보니 어쩌면 심리나 감정 같은 기름기를 싹 걷어낸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지니게 된 게 숙명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독자가 이입하고 몰입할 수 있는 여지가 어느 정도만 있었다면 훨씬 더 대중적이고 매력적인 작품이 됐을 거란 아쉬움이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줄거리, 캐릭터, 사건만 보면 재미있는 스릴러를 위한 재료들은 다 모여 있는 셈인데 대실 해밋이라는 셰프의 레시피는 그 재료들의 말초적이고 끈적끈적한 부분들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제 취향 가운데 하나가 지극히 대중적인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하드보일드란 겉멋을 살짝 입힌 스타일인데, 정통 마니아 입장에선 그건 사이비!”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지만 전 딱 그 정도 수준의 하드보일드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하드보일드에 적응 못한 불평만 잔뜩 늘어놓은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예로 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드보일드라는 게 문장 하나, 문단 한 대목을 콕 찝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이런 인상비평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직접 읽기 전에 하드보일드에 대한 편견을 갖는 것은 무모한 일이니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생긴다면 대실 해밋이든 레이먼드 챈들러든 아니면 다른 어느 작가를 통해서라도 한두 편쯤은 직접 맛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하드보일드에 부적응 증상을 보이면서도 책장에 방치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는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