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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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를 처음 접한 건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누가미 일족을 통해서였습니다.

비듬 날리는 더벅머리에 어수룩한 외모의 긴다이치 코스케에게 반하기도 했고

시대물의 매력과 아날로그 냄새가 폴폴 나는 각별한 미스터리의 맛에 홀딱 빠졌던 건데

한참 만에 시리즈 다시 읽기를 통해 재회한 이누가미 일족

여전히 강한 흡입력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통해 명품 고전의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신슈 지역의 나스를 기반으로 한 기업가 이누가미 사헤가 불길한 유언장을 남긴 채 숨집니다.

본처 없이 세 명의 첩만 뒀던 사헤는 그녀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과 손자-손녀들보다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은인이었던 자의 손녀인 다마요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유언장을 남겼는데

본문 속 표현대로 유족들을 피로 피를 씻는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던져 넣은그 유언은

실제로 끔찍한 참극과 함께 이누가미 일족을 충격과 분노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문제는 어려서부터 다마요와 가까이 지낸 덕에 가장 유력한 상속 후보였던 맏손자 스케키요가

때마침 패전 귀환병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부상으로 얼굴을 다쳐 고무가면 신세가 됐다는 점.

그가 진짜 스케키요냐 여부를 놓고 격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점차 유산상속전이 가열되는데

거기에 찬물을 끼얹듯 끔찍한 살인극이 시작되고 맙니다.

 

다소 추상적인 일본 문고판 표지에 비해 메시지가 확실해 보이는 한국판 표지를 보면

줄거리에서 언급한 맏손자 스케키요의 고무가면이 이 작품의 중요한 설정임을 알 수 있는데,

핵심인물이 가면을 쓰고 등장할 경우 미스터리의 전개 방향을 대략 가늠할 수 있긴 하지만

복잡다단한 캐릭터와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을 정교하고 꼼꼼하게 직조한 설계 덕분에

꽤 쉬워 보일 것 같았던 미스터리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수렁에 빠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탁월한(?) 독자 가운데에는 범인이 빤히 보였다.”는 서평을 남긴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누가미 일족은 범인 찾기 자체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대목들이 많아서

미스터리 이상의 다양한 감정들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 탐욕, 복수, 증오 등 인간이 서로에게 겨눌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그 감정들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우연들과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끔찍한 비극의 여운이

오히려 (미스터리보다 더 압도적인)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라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의 이누가미 사헤가 겪었던 구원과 은혜, 배신과 죄책감의 흔적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 상처들이 대를 이어 거듭 덧나면서 끝내 피비린내 나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독자에 따라 막장의 끝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이 누구냐를 떠나 인간 감정의 민낯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마지막 장까지 미스터리 못잖은 서사의 힘을 발휘한다는 생각입니다.

 

전작인 밤 산책팔묘촌에서 다소 소극적이거나 비중이 적었던 긴다이치 코스케는

이번 작품에서는 초반부터 이누가미 가문 가까이에 머물며 적극적으로 수사를 펼치는데

덕분에 옥문도이후 오랜만에 그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사소한 단서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해두는가 하면,

작은 깨달음에도 쉽게 흥분하며 비듬이 휘날리도록 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그의 모습은

언제 봐도 정감 가는 명탐정으로서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고 있었습니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복잡해서 내용 소개를 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작품이다 보니

대략적인 인상비평에 가까운 서평이 되고 말았는데,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점은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나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가급적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작품을 읽었으면, 하는 점입니다.

누가 살해되는지 자체도 호기심을 일으키는 대목인데

서평이나 소개글에는 그런 내용들까지 제법 상세하게 노출돼있기 때문입니다.

사심 가득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팬이라 저의 추천도 객관적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누가미 일족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는 명품이라

아직 이 시리즈를 접하지 못한 독자라면 첫 만남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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